소감문을 궁금해하시는 스님 덕에 글로 다시 한 번 남기게 되었습니다. 궁금해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이 참에 엔카운터를 마친 후 며칠 간 제 맘을 돌아보고 살펴보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엔카운터를 마치고 능조님이 터미널까지 저와 랑림님을 태워다주시며, 아쉬움에 눈물을 흘리셨습니다. 그 눈물이 자기 전 며칠 동안 계속 생각이 나고 마음이 뭉클했습니다. 엔카운터란 이런 여운이 아닐까 싶었습니다.
가장 기억나는 건 보광님과 일우님이었습니다. 어쩌면 일우님은 보광님의 우쭈쭈를 바라는 신세한탄이 동사섭 행복마을 전체 이미지에 타격을 줄까 걱정되셨던 것 같습니다. 그렇지만 저는 사람 사는 곳은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그 모습은 어딜 가나 유사하다 생각해서 보광님 말씀을 더 솔직하게 듣지 못한 아쉬움이 남았습니다. 또 우리가 함께라는 구호(?)를 일우님보다 보광님 입에서 나왔더라면 더 아름다운 마무리가 되지 않았을까 싶었고, 대신 일우님이 얼마나 동사섭을 아끼시는지를 알게 되었습니다.
그 다음으로 생각나는 건 열매님이었습니다. 사람이 조금 놀라면 소리라도 지르지만, 너무 놀라면 소리도 못 지르고 몸을 옴짝달싹 못하게 되는데 그게 열매님의 마지막 모습이 아니었을까 싶었습니다. 저도 비슷한 상황에 처한 적이 있었는데, 그럴 때 상대방이 코너에 몰려 질려버린 모습을 알기란 참 쉽지 않다는 걸 알게 되었습니다. 바람 핀 사람에게도 숨구멍을 틔워줘야 화내지 않고 미안하다는 말을 들을 수 있는 것 같은데, 열매님이 마음을 잘 회복하시길 바래봅니다.
그렇지만 열매님이 이끄는 집단에 집단원으로 참가한다면 저는 거부하고 싶은 생각이 들었습니다. 누구나 자신만의 심리적 어려움이 있고 그걸 적당히 다독여 안고 살아가지만, 열매님께는 죄송한 말씀이지만 그 다독임이 더 필요하시지 않을까 싶어서입니다.
다음으로 생각난 분은 산처럼님 입니다. 저는 산처럼님처럼 묵묵하지만 걱정스러워하는 분을 무시할까봐 조심스러웠습니다. 산처럼님이 꿋꿋하게 열매님편에 서서 아쉬움을 이야기하시고, 따뜻한 마음을 말씀해주시면서 자연스럽게 산처럼님을 존중하게 되었습니다.
중조님께서 "사람이 죽어가는데 촛대 불꽃이 무슨 소용이냐!"하고 큰 울림을 주셨는데, 산처럼님이 죽어가는 사람에게 마지막으로라도 온기를 주시려 했던 게 아닌가 생각해봅니다.
제가 가장 기억에 나는 말은 "찬탄드립니다!"라는, 다소 생소하고 커다란 말이었습니다. 반가운 놀람을 표현할 때 하시는 말씀이었는데, 그게 참 존중하고 존중받는다는 느낌이었습니다.
저는 상담을 배울 때 집단에서 리더가 이끄는 느낌이 아니라 집단원들이 상호작용하도록 판을 깔아주는 리더가 좋은 리더라고 배웠습니다. 도안님이 아무 것도 안 하시는 것처럼 계시지만 좋은 장을 열어주셔서 신기했습니다.
엔카운터의 유연함으로 일우님이 음양요가(?)를 지도해주신 점은 좋았지만, 갑자기 한뜻님과 열매님이 노래를 부르시는 것은 여전히 조금 이상한 느낌입니다. 부르는 분들은 즐기셨지만 저는 어른들과 회식 장소에 온 것 같은 기분이 들어 자유롭지 못하다 생각해서 편안하지 않았던 것 같습니다.
저에 대해서도 꽤 되돌아보게 되었습니다. 저는 평소에 인간관계에 대한 고민이 있지만 지금은 남자친구와의 돈독함으로 타인과의 관계가 불만족스러운 점이 상쇄되고 있습니다. 엔카운터에서 이렇게 여러 사람들이 따뜻한 시선으로 바라봐주시고 경청하려고 온몸으로 준비되어 있다는 게, 보는 것만으로도 감동이었습니다. 귀가 닫히고 입만 열린 어른을 낮추어 '꼰대'라고 하는데, 귀가 열린 어른들로만 모인 이 그룹이 신기했고 감사했습니다. 어쩌면 다시 가고 싶다는 생각이 드는 건 이 점이 아닐까 싶었습니다.
돌아오는 터미널부터 서울까지 랑림님과 아지님과 한 숨도 쉬지 않고 수다를 떨었습니다. 엔카운터에서는 그렇게 얘기하지 않았는데, 오는 동안 더 친해진 것 같습니다. 집단에서 못다 한 모습을 보여주며 여운을 나누었습니다.
오늘 TV에서 영화 '어린왕자'가 나왔는데, 엔카운터 같았습니다. 우리가 시간을 들여 의미있는 존재로 서로 길들이고 떠나온 듯 했습니다.
마지막으로 제가 거듭 말씀드렸지만 용타스님을 뵙지 못해 아쉽습니다. 언젠가 뵐 날이 있기를 바래봅니다.
참만남 소감문
생기
이번 참만남 집단에서는 좀더 깊은 배움이 있었다. 장이 어떻게 전개될지 예측되지 않는 불편함을 놓아버리고 임하니 배움이 더 컸다.
특히 열매님과의 장에서는 내 모습이 확연히 보였다. 내 생각에 갇히고 이해받고 싶은 욕구와 억울함에 가려 상대가 잘 봐지지 않았던 것이 객관적인 장면에서는 잘 보였다.
아들이 “나를 믿지 못하지 않느냐?”고 말할 때 ‘나는 믿었는데 너가 못믿을 행동을 했다.’고 생각해서 오히려 믿는 도끼에 발등 찍힌 것 같아 억울함이 더 컸다.
아들에게 “미안해.”하는 말을 할 때도 속마음은 ‘너가 나에게 더 미안해할 행동을 했다.’고 하는 것이 있었다. 먼지님이 말씀하신 이중적인 면이 이해되었다. 아직 아들을 받아줄 수 있는 큰 품이 아니었다.
한뜻님이 아들이 원하는 것에 대해 “쉽게 하는 것이 아니다.”는 말씀에 나는 상대 마음보다 말에 내멋대로 단정지어 말하는 구나! 알아차렸다. 이어서 보광님이 “생기님이 쉽게 생각해 보세요.”라고 했을 때 순간 가벼워짐을 느꼈고 생각의 전환에 대한 신선함이 있었다. 내가 문제를 좀 쉽게 생각하고 가볍게 살아가면 어떨까? 생각하니 편해졌다.
시작부터 장에 함께 하는 분들이 주시는 관심과 도움의 에너지를 느끼고, 주고 받음의 배움이 있는 속에서 나는 생강님을 불편하게 지켜보고 있었다. 생강님의 얼굴 표정 하나하나에 신경이 가 있었다. 생강님의 굳어지고 미소짓고 웃고 말하는 거기에 가 있는, 생강님 표정따라 불편하고 편해지고 밝아지고 안심되게 움직이는 내 마음이 보였다. 내 안에 생강이 있음을 보여주고 있었다. 그리고 내 안의 생강이를 만났다.
그렇게 내 안에서 펄뜩이고 있었는데 ‘내가 그동안 봐 주지 않았구나! 몰라주어서 정말 미안해!’하는 눈물이 흘렀다. 내 안의 나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면서 이제 가슴으로 나와 소통이 시작되는 것이구나!
상담 공부하면서 들었던 ‘나와 먼저 소통하라.’는 말이 이 말인가 싶다. 그동안 들어주시고 도와주시고 함께 해 주신 여러 분들께 깊은 감사를 드립니다.
2017년 2월 엔카운터. 산처럼
들어가며....
며칠이 지난 관계로 그때의 생생한 느낌의 기록은 힘들 것 같으나 좀 더 떨어져서 관찰자 입장으로 바라 볼 수 있을 것 같아 나름대로 의미가 있을 것 같다. 보광님과 소감 쓸 때 중요한 이야기를 나누느라 충분히 소감문에 집중하지 못한 아쉬움이 있긴 있었다. 그렇다고 아주 시기적절한 나눔이라 후회가 되지 않고 참 잘된 일이라 생각 된다. 보광님의 카톡 메시지를 보고 나름 반가움도 있고 부담도 같이 있다. 그래도 스스로 정리를 시작하지 못하는 나에게 그 등 떠밈을 감사할 따름이다. 그리고 스스로의 정리가 주저되었던 것은 다소 엔카운터의 내용을 공개마당으로 들고 나오기도 조심스러운 면이 있었기 때문이다.
참가전의 내 마음상태
장인어른 교통사고로 아이들을 맡기지 못해 중급을 못가고 엔카운터를 가게 된 것은 내심 반가웠다. 상주공부모임을 통해서 큰 스님의 여러 법등명과 자등명의 기회가 있어 중급과정은 낯설지가 않지만 엔카운터는 늘 아쉬움이 남아있고 힘든 과제였기 때문이다. 그리고 열매님의 모질고 혼쭐나며 배우는 엔카운터 안내는 차라리 시원하고 감사해왔던 방식이었다. 그만큼 쉽게 눈뜨지 못하는 느낌을 자세히 안내 받을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열매님이 참가한다는 소식이 매우 반가웠다.
첫 시작
시작되자마자 설레임과 동시에 위태위태함이 느껴졌다. 도안님이 제안하는 직접적인 폭력이 아닌 한에서는 무엇이든 허용된다는 엔카운터의 너그러움과 열린 자세는 구체적으로 바라 던 바가 있었던 나에게는 불편함과 아쉬움이었다. 그래도 실망감과 동시에 묘한 흥미가 늘 자리하고 있었다. 늘 무엇을 하게 되면 그래도 성실히 참가하려는 평소의 습관도 있었고 어떤 형태로든지 배움을 충분히 있을 수 있다는 신뢰도 있었던 것 같다.
편치만은 않았던 진실한 내지르기
자기소개가 한 바퀴 돌고 처음부터 심상치 않게 벌어지는 거침없는 생강님의 표현 속에 묻어 있는 감정과 그것이 의아하고 불편해 보이는 열매님과의 주고받기는 당황 염려의 느낌을 주기에 충분했고 장을 신뢰하시는 다른 지도자님들과 도우미분들의 태도에 놀라웠다. 의지적인 자세보다는 확신의 느낌이 분명해 보여서 였다. 왜 내가 불편해 하지? 불편해하는 내가 있기 때문인데 어떤 모습에 충분히 공감하지 못했기 때문이겠지. 미진한 공감으로 벌레가 살아지지 않는 것은 분명했다. 지금 생각해보면 충분히 신뢰하지 못하는 마음과 벌어질 상황에 대한 직면하기 싫은 두려움이었던 것 같다. 충분히 그 아픔을 사랑하지 못하는 나의 열려있지 못하고 눈먼 부분이 분명히 있었다. 어쨌든 충분히 수심이 되지 못하여 계속 남아있고 짙어져만 갔다. 그래도 한 장면 한 장면 넘어가면서 다양한 모습으로 표현되는 생각과 느낌들이 괜찮았다. 도안님의 진심담긴 농담이 유쾌했고 부럽기도 하고 내 속에 너무 부족해서 배우고 실습해 가야할 인품이다 여겨져 큰 도전이 되었다.
생기님의 아픔
엔카운터가 묘하게 흘러가지만 생기님의 어려움이 너무 크게 보여지고 표현되었기 때문에 참 필요한 과정이었다 받아들여져 오히려 시원했다. 대부분 진심어린 충고주기였지만 받아들이든 못 받아들이든 생기님의 자신에 대한 피드백이었기 때문에 참 고마워하기도 하고 그 때 마다 내 놓는 아픈 신음과 관심에 대한 감사가 시원하고 따뜻한 장의 분위기가 느껴져 좋았다. 한참 쏟아져 나온 뒤 생기님의 감사하다고 하는 받기를 하지만 거의 받아들여지지 않고 흘려버리는 태도에 대한 날카로운 지적이 이어지고 답답함 분노까지 표현되기 시작했다. 그리고 생기님은 그 부정적 피드백에 거의 다 동의하는 희극적인 사태가 발생했다. 생기님의 그 행동에 대한 통찰에 놀라는 나 자신을 발견했다. 그리고 왜 나는 깨어있지 못하고 그대로 생기님의 표현을 그대로 믿고 따라가고 있는 나는 무엇을 하고 있었나? 하는 질문이 스스로에게 돌아왔다. 나는 생기님이 마음 아프게 하는 아들에게 하고 있는 여러 가지 답답한 모습이 나에게도 정도의 차이는 달리하지만 똑같이 있는 모습임을 발견하면서 내가 그렇게 하고 있는 패턴을 못 벗어나고 있는 이유, 당당함에 대해 돌아보고 있었다. 일반화해도 될 만큼 많은 부모들이 자식에게 저지르고 있는 사랑을 가장한 집착이지만 늘 시원하게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그랬다.
부정적인 피드백의 불편함
지금 다시 한 번 돌아봐도 내속에 신뢰와 관심과 사랑이 있었다면 그 장이 참 흥미진진하고 배워지는 바가 많았을 것이라고 확실히 믿어진다. 그 불편함을 유연하게 벗어나지 못하니 답답하고 그 답답함이 묵은 것이라 봐져서 스스로가 한심하기 까지 하다. 늘 따라다니기 때문이다. 그리고 내가 집중할 때에 가지는 패턴이 있다. 당연히 집중하지 않을 때는 습관대로이다.
그 패턴은 먼저 지금 여기에 머무는 느낌을 억압하지 않고 시원하게 쏟아낸 것에 다행스럽고 그만큼도 훌륭하다라고 수용해 본다. 그리고 그 때 나온 그 표현에 어떠한 판단도 성급히 내리지 않고 충분히 공감하고 본인이라면... 하며 느낌에 집중력을 가지고 몇 초 더 머문다. 그러했을 만한 이유들을 찾아가며. 그와 동시거나 직후에 상대방이 가슴이 아픔까지 살핀다.
생기님과 병행하여 나에게는 표현은 명료하지 않아 이해하지 못하겠다는 피드백과 지금 여기에 깨어있는 느낌을 바로 내어 놓지 않고 한 순간 걸러 내놓는 것 같아 답답하다는 피드백을 받았다. 약간의 억울함과 그렇다면 어떻게 하라는 거냐? 라는 저항이 일어났다. 후에 이야기되지만 열매님의 신념에 의한 못 받아들임과 맥락을 같이 한다. 물론 그 만큼 신념이 굳지는 않지만... 솔직함에 대한 묵은 저항감이 있었던 것 같다. 여기에 대해서는 ‘머피의 법칙’ 노래가사에서 솔직하게 쏟아내는 못생긴 여자와 미팅장소에서 만나게 되어 기분 잡쳤다!가 많은 청소년들에게 시원하게 공감되고 인기 있었던 것에 못마땅했던 옛 기억이 있다. 그로 인해 안에 머물러서 여러 가지 모습으로 이중 삼중 화살 쏘며 불행에 감옥에 빠지기보다 솔직하게 표현해 냄 자체가 참 훌륭하다고 감탄되어 짐에 머무르지 못하고 바로 판단으로 달음질하는 내 자신이 보인다. 그래도 힘들다. 그 사람에 대한 온기어린 공감 자체가 어려운 것은 나의 관심과 사랑의 부족함이고 이것은 근본적인 문제이다.
랑림님과 사랑님의 묘한 삐걱거림
이 장의 힘과 신뢰가 어떤 힘을 발휘하는 지 볼 수 있었던 참 재밌고도 감격스러운 시간이었다. 또 솔직한 표현의 힘이 유감없이 발휘되는 좋은 과정이었던 것 같다. 묵은 감정의 골이 아니라서 그나마 해결의 실마리와 희망이 보여서 많이 불편하지도 않고 많은 분들의 진정어린마음을 만나는 좋은 시간이었다. 해피엔딩에 의지하고 싶은 안전에 대한 욕구가 계속 발동했던 것 같다. 랑림님이 용기를 내어 솔직하게 사랑님의 벽에 불편하고 억울하고 야속함을 드러내는 모습에 박수쳐지고 위태위태한 불안감 보다는 더 나은 결론이 올 것이라는 예감마저 신선하게 들었다. 사랑님의 관계 맺는 생각이나 가치관이 좀 의아했지만 유연하게 아니면 힘들더라도 직면할 수 있을 것 같은 잠재력이 느껴져 바라보는 마음이 편안했다.
랑림님의 용기와 따뜻한 마음, 계속 해서 나오는 적극성이 참 아름답게 느껴졌다. 그리고 끝까지 성장해가는 모습을 볼 수 있었다는 것이 큰 즐거움 중 하나였다. 사랑님의 섬세함으로 묘사되었지만 나에게는 탁월한 재능의 가면에 숨어서 살아가는 안타까운 느낌이 계속 자리 잡았다. 자기 가슴이 느끼는 대로 산다는 것은 얼마나 큰 축복인가! 자신의 재능에 맞는 역할의 무게를 담당하느라 힘겨우리라. 놀라운 표현에 감탄하면서도 늘 그렇게 언제라도 터져 나오길 기다리며 바라보았고 짝 체조활동에서 적절하게 따뜻한 배려로 마음을 편하게 해주어서 참 고마웠다.
반달님의 등장
늘 힘겨운 짐을 내려놓지 못하고 혼자 다 감당하고 있는 듯한 표정에서 쉽게 안타까움이 생겼다. 계속 응원이 되었고 그 표현이 참 재미있고 깊이가 있어 늘 흥미를 더해갔고 그 후에 일어나는 장의 반응에 계속 관심이 집중되었다. 그 분의 상처의 깊이가 커서 직면하는 부담감이 묵직하게 느껴지면서 여기서 길을 찾을 것만 같은 희망이 느껴졌다. 그 표현에서 이미 시작된 것 같았다. 큰 기대를 가지고 모질게 아들을 몰아붙이는 아버지에게 복수하며 적지 않은 시간을 보냈을 반달님의 한 인생사가 진하게 절망과 불행의 드라마로 보여 져서 상대적으로 매우 가벼운 나의 삶의 축복스러움이 느껴졌다. 확실히 나의 것은 엄살이었다. 명상 중에 아버지의 영혼이 아들에게 빨려 들어가는 것을 보았다고 표현하실 때 섬칫했다. 쉽게 수그러들 것 같지 않고 자신도 어쩌지 못하면서 되풀이 하게 될 것 같은 불안감을 주었다. 표현하고 나왔으니 이제 회복될 일만 남았다고 장의 힘을 신뢰하고 조금은 더 가벼워지고 싶었다. 따뜻한 공감과 덕담이 이어진 것은 다시 돌아봐도 선물이다. 선물의 일부는 받으신 것 같이 다행이다. 내 아들에게 하고 있는 나의 기대와 집착의 무게를 다시 한 번 돌아보며 긴장하게 된다. 욕심인가 사랑인가? 집착인가 사랑인가?
묵은 한 풀어내고 찌꺼기 없이 있는 그대로의 맨 낯으로 만나고 싶습니다.
(생강님과 보광님의 열매님과의 갈등 드라마)
이 뭐꼬? 그만두고 가고 싶다의 격렬한 감정이 몇 번 일어났다고 수그러졌다. 아지님도 비슷한 고민으로 떠날 채비를 하며 하는 말에 공감하며 다시 전환하여 끝까지 머물러 보라고 이야기 하는 나의 역할이 우스꽝스러웠다. 물론 한뜻님께 지원을 요청할 수 있어서 다행이고 한 뜻님의 존재가 반가웠다.
그래도 장에서 여과 없이 그대로 받는 직면하기 힘든 질퍽거리는 감정들도 힘들었지만 그것이 풀리지 않는 분노가 되어 내 질러지는 것에서 오는 불편함. 전혀 시원하지도 않고 상당히 오래 반복 될 것이 뻔하게 보이는 데 대한 답답함. 위에서 말한 나의 신념 덩어리를 다시 반복하여 말하고 싶지 않고 그것으로 인해 내내 불편했다. 쉬는 시간에 만난 열매님은 평소에 저에게 다가와서 늘 조언과 힘을 주시 던 전의 모습과 달리 힘겹고 외로워 보여서 안타까웠다. 장의 무한신뢰하는 마음으로 기다려주는 도안님과 일우님! 정말 신뢰하지만 기가 막힐 만큼의 경지이셨다. 원망과 야속을 담은 감정의 화살은 후배 능조님과 먼지님에게 돌아갔다. 그 전에 어떤 일이 있었더라도 지금은 충분히 옆에 가서 힘이 되어 줄 수 있는 분들 아니었던가? 적어도 지금은 그러한 때이지 않은가? 내려놓기 싫은 이 판단으로 다음 날 조금은 무게를 덜고 참여했다. 열매님의 회한의 오열과 변한 것이 없다고 또 변할 의지도 없다며 냉담하게 반응하는 생강님과 보광님의 응답에 묵은 무게들이 느껴졌다. 장은 불편했고 불편하면 불편해하고 좋으면 좋아지는 내 모습을 그럴 수밖에 없는 내 모습을 조금은 체념하며 받아들였다. 급기야 열매님이 이 공동체를 떠나시는 것이 더 낫겠다는 반달님의 폭탄선언에 격앙되어 바로 나가버리고 말았다. 내가 너무 급하게 나와서 반달님의 그 마음에 좀 더 머물러 보고 싶은 기회를 놓쳐버려 아쉬움의 표현 들을 만나야 했다. 분명 그러했고 그러했다라고 계속 음미하고 격앙된 감정을 바라보고 다독이며 한참을 추스르며 출현을 자제했다.
열매님이 장을 떠나버리고 마지막 전날 밤의 생강님과 보광님의 그간에 있었던 일을 듣게 되어 시원했다. 그래도 끝까지 시원해지지 않는 느낌은 어쩔 수 없었고. 일방적이고 늘 자신의 신념은 변하지 않고 고스란히 받아 안기만 해야되는 기막힌 상황도 너무도 공감되었다. 수없이 표현해 봐도 늘 그 자리라서 절망적인 그 느낌도 이해되었다. 하나의 거짓도 없이 진실을 이야기한다고 아침의 보광님의 부연해서 말씀해 주신 내용도 고개 끄덕여진다.
아쉬운 것은 그 이야기들도 충분하게 균형 있게 묘사되어지지 않았다는 것이다. 열매님의 그간의 긍정적이며 많은 도움을 주신 면이 아파하는 면들이 확 들어나며 힘없이 묻혀 버린 면이다. 그렇게 받아주기엔 지도자로서의 열매님의 자리가 어려움으로 계속 남아 있어 답답하고 이번에 열매님이 떠나게 되면 다시는 동사섭과 인연을 하지 않으실 것 같은 나의 확신 같은 것이 나를 괴롭혔다.
마지막 날 열매님과의 통화내용을 들으니 이해하지 못하고 소화 되지 못하는 씁쓸함이 있다. 마음은 편안해 지셨고 장을 위해 미리 떠나셨고 끝까지 좋은 시간가지기를 기대한다는 내용이었던 것 같다. 그래도 집으로 돌아올 때까지 역동적인 느낌으로 남아서 내가 알지 못하는 큰 힘들을 받았던 것 같다. 위에서 말한 묵은 숙제도 보이고 간밤에 지훈님과의 대화는 꿀같은 맛이 느껴졌다. 감사함으로 느낌을 마무리할 수 있을 것 같다. 정리는 덜 된바 있지만.(계속)
한뜻님의 장에 온기 있고 편안한 분위기 제공
늘 하고 싶음이 넘쳐서 흘러나오는 그 모습에 늘 다시 도전감이 일깨워지고 자세하고 자상한 안내에 시작부터 반가웠다. 나로서는 잠깐 열매님 엔카운터를 경험한 편이지만 한뜻님은 그 맛을 오랫동안 누렸고 그 예술과도 같은 경험에 자그만치의 지루함을 느끼는 모습을 볼 수가 없었다. 누구보다 열매님을 존경하고 살피시는 마음이셨겠지만 장의 분위기와 과정에 유연하게 역할 해 가시는 모습에 배워졌다. 지금의 그 모습이 있기까지 어떤 삶의 질곡의 과정이 있었는지 나는 잘 실감하지 못한다. 문득 문득 가슴에 와닿을 땐 가슴이 징하다.
인생사의 아픈 과정은 스케치 하듯이 들었었고 박사과정에서 겪으셨던 실감할 수 없었지만 그것들을 겪어내고 극복해내셨을 것 같은 힘은 간접적으로 느낄 수 있었다. 야생화 좋아하시고 관행하시며 산책을 늘 하시던 모습은 나의 경험을 바탕으로 해석하고 있었는데 반달님을 공감하시며 그전의 견디기 힘든 세상에 대한 실망감 혐오감을 자연에 피어나고 있는 그 들풀 들을 보지 않고서는 지내기가 견디기가 힘드셨다는 말씀을 하셨을 때 짠하고 부끄러웠다. 나는 절대로 (그래 절대로가 맞다.) 타인을 진정으로 이해 공감할 수가 없구나. 충분히 분노하고 탓하며 늘상 그렇게 지내셔도 당연할 것 같은 데 지금은 긍정에너지를 감사와 열정의 에너지를 풍기며 살고 계시는 구나. 많이 배워졌다. 그리고 아득하기도 하다.
중조님 백월님 따뜻하고 죄송합니다.
간접적으로나마 그 숱한 드라마와 배울 점이 가득한 중조님의 삶의 보따리는 늘 한가지 배워가기도 허걱거리는 나에게는 또 다른 짐처럼 부담스러워 엄두조차 못내고 쮸뼛하게 만나고 있어서 늘 죄송했고 백월님도 자주 만났지만 그 따뜻함과 자상함 인상만 간직하고 참만남을 시도해보지 못한 죄송함이 늘 가슴한자리에 있습니다. 이 모두가 내가 만들어낸 인상이고 생각 덩어리일 것인데 다시 내 삶을 돌아보면 낯선 것도 아니다. 해결하지 못하고 지나가면 더 크게 불어나서 또 만나게 될 결국엔 내가 겪어내고 극복해내야할 과제인 것 같다.
능조님 먼지님 참 멋지십니다.
그 인생사를 완전히 열고 듣기엔 부담스러웠는지 내 가슴을 계속 살펴보며 방어하며 들었다. 눈치 없는 눈물이 울컥 올라오기 때문에 감시 하에 두면서 인간의 그 혐오스러움이 진하게 느껴지면서 내 속에 그런 냉담함과 잔인함과 무책임함이 꿈틀대지 않는지 살펴졌고 눌려져서 그러지 못하는지 정화되어 괜찮게 지내는지 소름이 돋는다. 어린 나이에 그런 모진 경험을 겪게 하는 것은 아버지만이 아니라 세상의 정화되지 못한 인과 덩어리가 그렇게 토해내는 눈뜨고 보기 싫은 막장이었고 나에게는 무한한 허공에 티끌보다 작은 만만한 것이 아니고 묵직하고 두려운 덩어리로 여겨진다. 감사와 지족의 쌓임이 한참 얕아서인지 감사의 이불로 덮었는데 가면 쓴 기분이 느껴지면서 두려움이 언뜻 언뜻 느껴진다.
이번에 탄핵이 안 되고 역사가 돌아간다면 몸서리 쳐지도록 싫고 역겨워하면서 보내고 싶은 심정이었다. 흔들리지 않고 깨어 있으며 사랑으로 관심으로 서있는 것은 기만, 속임 말고는 불가능할 것 같은 생각이 든다.
그런데 능조님과 먼지님은 서 계시는 것 같다. 진정성이 느껴지면서. 먼지님의 인생사는 자세히는 모르지만 정화의 짧지 않은 긴 과정이 느껴지며 내 감정이 합당하다고 느끼고 있는 결정을 흔들어 준다. 나는 부자연스러우면서도 감사의 시간이요 경험이라고 결론 내릴 수밖에 없다. 열매님이 힘들 때 후배로서 좀 힘이 되는 모습을 보여주지 않는 원망감도 내 속에 그랬으면 하는 아니 당연히 그래야 할 것 같은 그 무엇도 내가 만들어낸 생각일 뿐이지만 그래도 그런 생각이 일어난 것도 믿고 의지가 되는 두 분의 인품에서 나왔다.
아지님 반가웠어요.
아들 해성이의 음악에 대한 상담을 시원하게 들을 수 있는 좋은 기회를 주었고 질문할 때마다 답변이 간단 명료 적절로 한방에 시원하게 되는 것이 얼마나 신기한 지 다시 돌아봐도 그렇다. 예술가에 대한 나의 선입견도 만만치 않았나 보다. 답답해하면서도 회피만 하지 않고 자신의 역할을 잘 해내는 모습도 좋았고 눈에 보이는 것 지금 답답 실망한 느낌의 표현이 나오는 중에서도 아지님이 가진 무한한 잠재성을 보면서 편안하게 바라봐 주시는 님들의 인간에 대한 신뢰감에 배워지고 또 아득하다.
이번 엔카운터를 돌아보며
아쉬움, 복잡함, 불편함, 두려움, 짜릿함, 생생함 등 여러 가지로 마음을 흥분시키고 긴 여운이 남게 했던 짧지 않았던 시간이었고 집에서 지훈 님과 소감을 나누며 다시 그 격동의 감정이 한참을 요동쳤다. 나는 뭘 배웠고 얻었는지 선명하게 정리되지 않고 스스로 정리해야 될 것으로 남겨둬야 할 것 같다. 도안님과 일우님의 가르침을 어떻게 느낌으로 정리할 수가 없다. 그때그때 놀랍고 고맙고 시원하기도 하고 재미있기도 했건만 손톱만큼만 얻어갔다는 자책을 피할 수 없고 그랬다고 정리하는 것이 마음이 편하기도 하다. 나는 성장하기 싫어서 계속 도망다니면서, 방어하면서 엔카운터를 참가했나 보다. 물론 내 무의식의 놀음이었지만 나의 의식도 이런 가면에 모른척 하나보다.
보광님이 마지막 날에 들려주신 속내를 들으면서 그 사실도 시원하고 안타까웠지만 나로서는 차려진 밥상만 바라보고 그 이전의 어떤 수고가 있는지 관심조차 두지 못하고 있는 미안함이 한참 망치질했다. 그리고 그것 때문에 내 소감문이 제대로 쓰여 지지 못한 것에 대해 미안해하면서 다시 소감을 부탁하시니 부담스럽지만 내심 반가운 느낌도 있었다. 그 느낌의 출처는 내 무의식인지 자성인지 잘 모르겠다. 미련이었던 것 같기도 하고 그냥 묻어버리고 평상시로 돌아가려고 하는 내 습관에 대한 자성의 저항이었는지도 모르겠다.
분명 내 마음속에서 이상한 요동이 느껴지지만 지금도 선명히 정리가 안된다. 나의 인생사도 드라마틱하지는 않지만 좀 꿈틀대었을 것이다. 다른 사람의 가슴에 관심이 가기 시작했다. 아직 막막하지만. 그것조차도 참 편하지 않고 얼른 습관으로 돌아가려는 관성이 바로 왔었는데 많이 무장 해제된 느낌이다. 확실하지 않아 소감을 스케치로 마무리하고자 한다. 다시 생각해보면 보광님의 열매님과의 관계에서 불편함을 묵직하게 풀어냈던 것은 참 장에 도움이 되고 나에게도 많은 도움을 주신 것 같다. 내가 지금 당장 배우고 실천해야 할 부분이다. 늘 아쉬움이 남아서 다음에 또 되풀이되는 악순환을 반복하지 않기 위해서는.
-어머니의 무차별적인 맹목적인 사랑에 대한 부담감이 이제는 편안하게 이해할 때도 되었는데 습으로 남아있다. 판단과 묵은 습관적 반응이 자꾸 되받아칠려고 하는 에너지가 생기는 것을 어쩔 수 없다. 잘 조절하고 감사로 이야기를 끝내는 것도 어슬픈 가면인지 돌아봐진다.
-가슴은 따뜻하셨겠지만 늘 호통, 칭찬에 인색한 아버지와 지냈던 청소년기의 인정에 목마르고 무척이나 작아진 내 정체성이 아직도 아픈가 보다. 세상이 힘겹고 사나워서도 맞겠지만 박정희 시절 은혜 받으셨다는 믿음이 지긋지긋해 내가 힘이 좀 생겼을 때는 길지 않은 세월을 말싸움하며 대들었었다. 답답하고 싫었지만 아버지셨고 가정에서는 가장의 자리를 책임지시는 분이셨다. 철이 들고 돌아가시기 얼마 전까지 관계가 좋아졌지만 미안함이 가득하다. 여러 가지 가치관과 생각으로 적대적으로만 규정했었다. 느낌에 눈떴더라면 참 좋은 신 분 맞으신데. 늘 당신이 살아온 합당한 가치관에 맞게 살면서 부담스럽게 당신의 뜻대로 되라고 주시나 감시가 아닌 따뜻하게 웅시하시는 분이셨는데...
-늘 자유롭지 못하고 부담스러운 몸에 맞지 않는 책임감, 사명감을 입고 살아온 연약한 내 자아! 참 존경하는 맘이 생기고 배우고 싶은 활동가 선배들이 옆에 계셨고 나는 늘 자신감 없어하며 겨우겨우 견뎌내는 모습으로 참 도움 많이 받아가며 의지하며 지내왔다. 어느 듯 나이가 들어도 나는 크게 성장한 것이 없고 다시 내 주위엔 존경스러운 후배들이 그 의미도 있고 귀한 일이지만 힘에도 많이 겹지만 잘 감당하고 멋있게 살아가고 있다. 자꾸 자꾸 작아진 나를 입고 살기가 버거워 계속해서 벗어날 꿈을 꾸었는데 늘 되풀이 되는 삶이다. 또 선택을 늘 그 모양으로 하고 있기 때문이겠지. 그 분들에게 그 후배들에게 조금이라도 힘이 되는 이웃이 된다면 나는 감지덕지지 하며 살아왔다. 그런데 동사섭에 와서도 다 그런 분들 같다. 거기다가 정체관으로 보면 나의 자성은 무한 긍정이요 세상의 주인이란다. 기가 막힐 노릇이다. 나는 늘 실뱀이었었고 지금도 그런 것 같은데 바른 관점으로 보라고 하니 좀 그러고 보면 그런 것 같고 감동도 오는데 곧 돌아온다. 실체감이 너무 선명하게 느껴져서 마치 진짜처럼.
-우리 반 아이들이 참 좋다. 진짜 사랑스럽다. 그리고 감사하다. 가끔 자신의 아픔을 드러내며 막 쏟아 놓을 때는 받아 주기가 버겁고 내가 아프다. 내가 원인인 것 같고 충분히 그의 아픔을 받아주고 공감하기에는 에너지를 조금 쏟고 나를 계속 돌아본다. 작게 살아왔던 나를. 그래도 지금은 두 가지를 동시에 하고 있는 듯하여 많이 좋아진 것 같다.
-가족이 너무 사랑스럽고 좋다. 행복한 가정을 꾸리는 것이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의 역할이라고 여겨왔다. 자식들에게 우리 부모세대들은 역할에 짓눌려 소홀할 수밖에 없었던 불행한 관계의 되물림을 나는 다시 되풀이 하고 싶지 않았다. 그런데 우리 가족과 지내는 것이 나는 행복하다. 그래서 내가 자랑스럽기보다는 내 아내 내 아들들과 딸이 고맙다. 어찌 그리 부모의 좋은 점을 잘 받아 챙겨가고 안 좋은 점은 별로 안 받아 갔는 지 기특하다.
-물론 오래 묵은 습관이 아직도 날 부자연스럽게 묶고 있지만 자연을 동경하고 마음 공부를 버거워도 재미있어하며 찬찬히 해가고 있는 내 자신에게 괜찮게 살고 있다고 지금은 말할 수 있다. 어느덧 이미 그렇게 말하고 살고 있었다. 구현의 기쁨은 이미 아주 작아진 상태이고 지족의 기쁨이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다. 놀라운 변화다. 언제부터였는지는 모르지만 모르는 사이에 벌써 그렇게 되어버렸다. 이번 엔카운터 때 도움된 부분이 느껴져서 부인하지는 못하겠다. 그래도 다시 엔카운터를 하고 싶냐고 물으면 주저된다. 두렵다. 그래도 감사하다. 왠지 감사하다로 끝맺는 것이 느낌상으로 맞는 것 같다.
제5회 엔카운터 소감문 능조님
동사섭이 내 삶에 들어온 이후 가치관 정립의 중요성이 내게 가장 소중했다. 그 결과 나는 수심쪽에 치우치는 경향성을 보였다. 그런데 어느 순간 화합의 소중함이 내안에서 커지는 것을 봤다. 하지만 하면 할수록 엔카운터장에서 부정적인 경험들과 뭔가 어색하고 부자연스러운 감정들이 늘 그 자리를 피하게 만들었다. 원래 내안의 세계로 침잠해 들어가는 경향이 강한데다 엔카운터장이 더욱더 생각에 생각을 더하도록 하기도 했다. 지금 돌이켜 보니 내가 극복해야 할 내 경계였음이 확연하다. 예를 들면, 다음과 같은 질문들이었다. 느낌이 무엇이지? 이것이 느낌 맞나? 왜 느낌 표현이 쑥쑥 되지 않나? 이렇게 표현해도 되나? 왜 느낌을 표현해야 하지? 내 마음을 받아주는데 왜 더 불편하지? 공감을 한다는 것이 진정 가능한가? 내 마음을 표현할 때 얼마나 마음과 표현이 일치하는가? 등
선사 동사섭은 어떠했고 초기 동사섭에서 백장암 엔카운터는 어떠했다고 들을 때마다 과거 동사섭을 경험하지 못한 사람으로 소외되었다. 이번 장은 누가 좌장을 맡고 또 어떤 구성원으로 채워질지 완전한 미지수였지만 초기 동사섭을 경험해 보는 것으로 내게 의미가 컸다. 어떤 사정으로든 불참하시는 모든 도반님들이 안타까울 뿐이다. 한번도 해본 적 없는 4박5일 동안 온전히 엔카운터로만 진행되는 장에 대한 기대가 컸고 개인적으로 참석을 위해 무리를 하며 준비를 가장 많이 한 과정이었다. 지금 돌아보니 업무분장과 시수배정 즉 학년 초 가장 중요한 시기에 병원에 입원한 심정으로 엔카운터에 잘 참석했다는 안도감이 가슴 한켠을 쓸어내린다.
엔카운터를 시작할 때 전 마당에 참석하겠다는 서약서를 쓰는 것에 관한 이야기를 들려주신 도안님께 진정 감사하다. 참석할 때 마음은 첫날 참석하고 이튿날 학교에 되돌아가는 것으로 계획하고 왔기 때문이다. 사무처에서 한마당이라도 빠지게 되면 참석할 수 없다는 이야기에 반발심이 생겼고 다른 사람은 안되는데 나만 된다는 이기적인 발상의 말을 당황해서 내뱉았다. 중간에 돌아간다는 생각을 하지 않았다면 아예 오지 않았을테니 이 점에 관해서는 일우님께 진심으로 감사하다. 나는 과정 중에 학교 소집일이 있다는 것을 알고 바로 사무처에 엔카운터 불참을 통보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일우님께서 전화를 해서 학교 소집일날 그 마당만 빠지고 나머지 과정을 참석해도 된다고 권유해 주셔서 마음을 돌리게 되었다. 중간마당을 빠져도 된다는 여지를 일우님께서 만들어 주지 않으셨다면 나는 이번 엔카운터에 참석하지 못했을 것이라 생각하니 마음이 안좋다.
첫 번째 아하점은 보광님의 생각과 느낌 표현에서 무엇인가 표현되고 있는 이상의 감정이었다. 그 정체가 무엇인지 모르겠으나 표현되지 않은 뭔가 묵직함이 내게 전해져 왔다. 내가 표현되지 않고 있는 무언가를 느끼고 있다는 것이 중요했다. 다음으로 이어지는 시간에 보광님 속마음이 어느 순간 내 마음으로 와 닿으며 울컥 눈물이 났고 내 마음 가득 미안함으로 가득찼다. 행복마을 문턱이 닳도록 들락날락하며 늘 이곳에 계신 보광님 마음을 한번도 알아주려고 하지 않았던 나를 돌아보는 순간이었다. 공감이 말로 표현되지 않고 마음으로 되고 있음을 알았고 내 마음이 보광님 마음을 알고 있다고 생각하는 순간 아무말도 필요없고 보광님 마음이 내 공감을 알아차려 주는 것이 내게 전해져 왔다. 그 때 내 마음과 보광님 마음은 경계가 없었다. 내 생각에는 아무말 없이 얼싸안은 그대로 순간 한마음이었다.
두 번째 아하점은 화자 중심에 묶이니 생기님 가족사를 듣고 내마음 안에 일어나는 생각 즉 하지 않아야 할 충고나 비난을 말하지 못해 침묵권에 있는 나자신을 발견한 것이었다. 그렇게 침묵권에 있다보니 생기님 상황을 문제로 인식하고 각각 문제해결을 위해 자신의 상황을 대입해 진심으로 최선을 다하고 있는 도반님들 모습이 생각과 느낌 두 측면으로 각각 객관적으로 보였다. 판단을 하고 있는 상황이 아니라 모든 분들의 겉마음과 속마음이 그대로 이해되었다. 어느 순간 도반님들 각자 문제해결을 위해 노력하고 있으나 전혀 생기님께 전달되지 않고 제시한 해결책대로 잘 안될 것 같아 답답할 수 있겠다는 마음이 들었다. 그런데 어느 순간 정작 좋은 의도 즉 아들과의 연결을 위해 최선을 다하고 있는데 오히려 역효과가 나고 있으니 얼마나 답답하고 힘드실까 하는 생기님의 마음에 머물러졌다.
엔카운터장의 극적이고 절박한 감정들이 표면으로 드러나는 상황이 생기님 진심이 드러날 수밖에 없게 이끌었다고 생각한다. 그때 내가 교육이라는 이름으로 학생들에게 의도하지 않는 상처를 주는 내 모습이 떠올랐다. 이 세상에서 가장 사랑하는 엄마에게 세치 혀로 용서받지 못할 마음 상처를 주었던 내 모습이 스쳐갔다. 그러하니 생기님 마음이 순간 내 마음으로 들어오는 것. 같았다. 아, 이게 그 사람을 이해하는 것이구나, 이게 말하지 않더라도 일어나는 공감이로구나가 이해되었다. 내가 하는 공감 표현은 더 이상 무의미했고 그 마음을 내가 알아주고 있는 것만으로 충분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공감한 상태에서 물론 충고가 표현되지도 않고 충고를 하게 되더라도 상대방이 충고로 받아들이지 않을테니 상관없다는 생각이 든다.(계속)
세 번째 아하점은 먼지님의 행동에 대한 내 안의 걸림과의 만남이었다. 장이 시작되고 랑링님 맞이하러 가시는 먼지님 모습이 걸렸다. 랑링님 맞으러 가시는 먼지님의 배려하는 행동에 내가 걸려있네 하는 마음으로 있었고 이후 먼지님께서 그 부분을 사과하셨을 때 이해받는 기쁨이 있었다. 장과 장 사이 쉬는 시간 부지런히 청소를 하고 전체 장을 두루 살피시며 분주하신 먼지님의 모습이 걸렸다. 그런 모습을 보고 나도 평소 해오던대로 컵을 씻으려고 했는데 먼지님께서 컵은 각자 씻었으면 좋겠다는 말씀을 하셔서 의아했다. 나도 서로 엔카운터 마당에만 집중했으면 하는 바램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컵도 각자 씻고 청소도 다 같이 하든지 다같이 안하든지 했으면 했기 때문이다. 청소는 하시면서 컵은 그랬으면 한다고 말씀하셔서 의외였다.
나중에 개인적으로 이번 장에서만큼은 온전히 마당에만 집중하고 싶은데 먼지님 모습을 보니 이러저러한 걸림이 있다고 말씀드렸다. 그러하니 먼지님께서 보조진행을 맡고 있고 수련비를 내지 않는다고 하시면서 컵까지 씻는 것은 무리가 될 것 같아 각자 컵을 씻도록 두었으면 한다고 하셨다. 그렇다면 사용 후 나와 있는 컵은 중간에 내가 씼고 화장실 쓰레기통은 수련생들이 잠자는 시간에 내가 비우겠다고 말씀드리고 나서 내 마음이 편안해졌다.
지금까지 주변 사람들을 챙기느라 정작 자신은 챙기지 못한 내 모습이 어느 순간 돌아봐졌다. 이번에는 의도적으로 작정을 하고 백퍼센트 장에만 몰입하기로 마음을 먹었다. 먼지님이 보조진행자라는 말씀 듣고 짐작컨대 보조진행과 자원봉사 활동을 사무처로부터 부탁받았거나 스스로 그러하셔야 한다는 마음으로 임하시고 계실 수 있다는 것을 이번 대화 없이는 전혀 알 수 없었을 것이다. 돌아보니 먼지님이 분주하게 일하시는 모습을 선뜻 돕지 않는데서 오는 불편함, 장에만 집중하고 싶은데서 오는 개인적인 욕심 등이 걸림으로 드러난 것 같다. 나도 주변 사람들이 이런 나, 자신을 제치고 주변 사람들을 먼저 챙기는 내 모습을 바라볼 수 있도록 해주지 않았으면 몰랐을 내 모습에서 의도적으로 벗어나고 싶었고 그 무엇에도 관심 흐트러트리지 않고 오로지 장에만 집중하고 싶은 마음이 강했던 것 같다.
네 번째 아하점은 먼지님의 저항 단어 부정감정 표현에 대해 반달님께서 구체적인 예로 열매님과 생강님간에 오가는 부정감정을 예로 드신 것이었다. 다음날 저항에 대한 예로 열매님과 생강님간의 부정감정을 들기 위해 즉 부정 피드백을 위해 앞서 열매님에 대한 긍정 피드백을 먼저 말씀하셨다는 것을 듣고 그제서야 반달님 마음이 이해되었다. 그런데 울컥하시며 내어놓은 열매님이 도움 주신 정작 반달님 머리를 해머로 때리는 듯한 가르침에 대한 반달님 속마음이 너무 강렬해 그 부분에 머물러졌다. 심지어 그때까지 표면적으로 붉어졌던 열매님과 생강님, 보광님, 먼지님 등의 감정 교류가 싹 묻힐 정도 강도였다. 먼지님의 가슴 아픈 사연에 대한 관심도 사라지게 하고 열매님과 생강님간의 교류도 사라지게 했다.
솔직히 먼지님께서 나머지 13명을 위해 열매님과 보광님, 생강님간의 묵은 감정은 장밖에서 풀어야 한다고 하셨을 때 이해는 되나 반감이 올라왔다. 내 생각에 지금 이 순간 불꽃이 다만 지금 이 순간 불꽃이 아니로구나 하는 통찰이 엔카운터장에서 일어났고 이치적으로 생각해 보더라도 우리모두 각자의 주관적인 틀 즉 필터를 통과해 불꽃이 피어나기 때문이다. 그 필터 즉 어떤 경험을 내가 하고 살아왔느냐에 따라 어떤 사람은 구렁이를 보고 군침이 돌기도 하지만 어떤 사람은 구렁이를 보고 소름이 끼치기도 하지 않는가.
게다가 정작 열매님과 보광님, 생강님간의 묵은 감정은 장밖에서 풀고 오라고 하신 반면 먼지님 자신의 묵은 감정은 장에서 내어놓으시는 것인지 의아하기도 했다. 무슨 사정이 있으시겠지 하며 먼지님의 저항 단어에 대한 촛대를 듣다 보니 그 안에서 먼지님에 대한 이해가 일어났고 결국 먼지님 그러하시듯 열매님과 보광님, 생강님간의 묵은 감정이 이 장에서 풀어져야 함을 알았다. 왜냐하면 묵은 부정감정은 그 인에 그 과로 드러나는 그 존재의 실존 즉 의미 전부이고 그 존재의 전 역사, 전 인생을 아우르는 촛대로 피운 불꽃 즉 옳다 그르다 시비할 수 없는 그것 자체일 뿐이기 때문이다. 내가 그 감정을 어떤 시선으로 바라보고 있느냐에 따라 내 마음이 불편하고 담담하고 흥미로운 무언가가 될 뿐이다. 결국 내가 그것을 어떻게 생각하고 있고 그것에 대해 어떻게 말하고 행동하고 있는가를 살펴보면 된다. 화자, 청자 즉 우리 모두 각자의 의식 전개 과정 속에 있을 뿐이니까 말이다.(계속될 예정이었으나 이어서 못씀)
5회 엔카운터 소감문
김려원(랑림)
평소 저는 과거의 일과 사람을 놓지 못해 집착하기도 하고, 오지 않은 미래의 일을 미리 걱정하기도 하며 스스로를 많이 괴롭혀 왔습니다. 하지만 동사섭 행복마을에서 수련하는 동안만큼은 과거의 일도, 미래의 일도 전혀 생각지 않고 현재의 시간을 충분히 즐기고자 했습니다. 저를 괴롭혀 왔던 수많은 생각들을 놓아버리니 그제서야 마음이 평안해지고 자유로워짐을 느꼈습니다. 그저 하루하루 지금 이 시간에 집중하고 나의 마음을 알아차릴 때 가장 나다울 수 있고 행복할 수 있다는 것을 비로소 깨닫습니다. 도반님들께서 주신 귀한 가르침들과 따뜻한 마음들을 마음속에 깊이 새기고 충만한 마음으로 돌아가게 되어 무척 기쁩니다. 도반님들께 진심 어린 감사의 마음을 전하고 싶습니다. 감사합니다.
제5차 엔카운터 소감문(20170225)
한뜻 윤석우
폭력이 아닌 한 어떠한 것도 허용한다’는 전제하의 엔카운터여서 반가웠다. 긴장감 없이 마음껏 나를 드러낼 수 있는 자유로운 분위기와 느낌이 좋다. 27-8년 전 백장암 엔카운터를 떠올리면 마음이 흐뭇하고 그윽해진다. 그때 5박 6일의 엔카운터를 마치고 돌아간 후 보름 이상 명치끝이 따끈따끈했던 것을 기억한다.
2. 촛대 불꽃에 유념하지 않고 장에 참여하니 허용적이어서 마음이 편하기는 했으나 불꽃이 선명하게 드러나지 않는 데서 오는 아쉬움이 제법 남았다. 불꽃은 생명의 첫소리이고 그 첫소리가 곧 실존일 텐데 하는 조바심이 일었다. 그리고 사람과 ‘촛대 불꽃’을 구분하는 데서 오는 불편함이 있었다. ‘사람’이 곧 ‘촛대 불꽃’일진대 굳이 그것을 실존과 표현으로 나누는 것은 이미 말에 걸려 있음을 의미한다. ‘불꽃’이 선명하지 않다면 ‘느낌’에 깨어 있지 못함을 인지하고 마음의 안부를 깊이 묻는 노력이 선행되어야 할 것이다.
3. ‘주인공’ 개념의 엔카운터가 조금은 아쉬움으로 다가온 것은 부인하기 어렵다. 도반 중 누군가 관심의 대상으로 파헤쳐지는 행위는 부담으로 작용했다. 물론 어떤 프로그램에서는 그렇게도 하기도 하겠고 그럴 필요도 있겠으나 자연스럽지 못한 데서 오는 불편함은 남아 있었다. 물론 처음엔 의도한 바 아니었다는 것을 알았으나 시간이 흐르면서 의중이 드러나는 느낌 또한 버릴 수 없다. 처음 오신 도반님은 처음 오신 대로, 오래 함께 했던 도반님은 오래 한 대로 서로에 대해 알아가는 유익함은 있었다. 하지만 의도 없는 자연스러움은 못내 아쉬웠다.
4. 평가, 또는 판단은 내가 한다. 상대를 평가하거나 판단하는 것은 자칫 실존에 대해 실수를 불러 올 수 있다. 그러므로 자제해야 한다. 평가가 앞서면 듣는 이는 말하는 이의 말을 제대로 듣지 못한다. 부정적 평가일 때는 더욱 그렇다. 평가가 느낌으로 둔갑하는 상황은 없었는지 염려스럽다. 순간 A(가해자)와 B(피해자)로 둔갑하는 상황이 발생하였을 때, A가 왜 가해자인 것처럼 여겨지고 B가 왜 피해자인 것처럼 여겨지는지 살펴 균형을 잡는 일은 무엇보다 중요하기 때문이다.
5. 지금 여기 이 느낌에 집중하지 못한 아쉬움도 있다. 찰나 켜지는 불꽃들을 감지하지 못하고 과거에 매몰되어 추억담을 나누는 느낌이 들었기 때문이다. 물론 지난 촛대가 지금 여기의 느낌을 가져오는 이유가 된다면 그 자체로 소중하다. 그러나 과거 이야기는 나를 지금 여기에 있게 하지 않는다. 더군다나 일부, 특히 개인의 이야기라면 상대 가슴의 안부를 외면한 꼴이 되기 때문이다. 밀도가 촘촘하지 않은 안타까움은 숨기기 어렵다.
6. 촛대(생각)이 길어지면 지루하다. 생각을 듣는 데서 오는 집중력 저하가 장에 몰입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 생각이 꼭 필요하다면 모를까 장에 깨어 불꽃을 산뜻하게 드러내는 것에 비하면 여러모로 비효율적이다. 촛대가 존재하는 것은 불꽃을 위해서다. 불꽃만으로도 지금 상황을 감지할 수 있다. 두어 번이었지만 불꽃만으로 나를 드러내는 시도는 매우 신선했다. 역시 불꽃, 느낌이다. 엔카운터의 핵심은 역시 느낌이다.
7. ‘남을 걸리지 않게 하는 것보다 내가 걸리지 않게 하라’ 하신 큰스님의 말씀이 크게 와 닿는다. 지금껏 느낀 느낌이 내 안의 생각과 다름에서 오는 걸림을 느끼고 곤혹스러웠으나 장미학을 이해하고 함께 노력하여 성과가 컸다. 느낌을 선명하게 드러내어야 장이 산다는 논지는 느낌에 의미 부여를 덜 하는 분께서는 부담으로 작용할 수 있겠다 싶어 이해는 되었다. 하긴 세상에 규정된 것이 어디 있으랴.
8. 동사섭 공부를 체화하기는 쉬울 수도 하지만 또 한편으로는 지난한 일이기도 하다. 시간이 그것을 해결할 수 있을까. 세월이 흐르면서 오는 깨달음으로 그것이 가능하지 않을까 싶기도 하다. 그러나 역시 가장 쉬운 방법은 모든 것을 수용하고 인정하고 보듬을 때 가능할지 모르겠다. 수용하고 또 수용하고 인정하고 또 인정할 때 나도 살고 상대도 사는 것이겠다.
9. 이번 엔카운터를 기획하고 지도해주신 도안님, 일우님께. 그리고 사무처와 공양간 식구들께 감사드린다.
제 5회 엔카운터 소감문
보광 조혜윤 2017. 02. 25
연이은 수련에 신체적으로는 다소 부담이 있었으나, 기대가 컸던 4박5일 엔카운터가 시작되어 흥미로움과 기대로 설레게 맞이하게 되었다. 이번 나의 과제는 수심의 필터를 되도록 덜 거친 솔직함이었다. 사무처 직원으로도, 동사섭 지도자로서, 보광으로서 잘 보이고자 하는 욕구를 내려놓고, 강한 성격이 드러나지 않도록 부드러운 용어로 포장하여 표현해 내는 정제된 엔카운터 기술도 내려놓고, 거친 표현 그대로 여과 없이 내지르고 싶었다. 늘 어느 정도에서 머물렀던 어정쩡했던 엔카운터에서 벗어나고 싶었다.
결과적으로는 만큼 만족스럽다.
열매님에 대한 존재 자체로서의 마음이 아닌, 오직 촛대불꽃에만 집중하시는 본질 호도에 대한 의견도 표출했고, 본인의 호기심을 충족을 위한 마음 나누기에 대한 표현도 과감하게 해보았다. 그리고 무관심과 못마땅해 하시는 에너지에 대한 서운함과 어르신으로서 아랫사람에 대한 격려와 관심을 노골적으로 표현도 했다. 일단, 후련했다. 열매님의 눈물과 통곡이 1년 전, 6개월 전의 내용과 동일한 재방송일지라도...내 몫을 했으므로 내 안의 인정욕과 사랑욕을 그대로 직면했고 풀어냈으므로..그 순간 나는 솔직했으므로...
본의 아니게 사무처 근무자로서 시간이 주어졌을 때, 심신이 지쳐있었던 차에 위로 받고 싶었던 마음, 했던 업무에 대해서 인정받고 싶고 관심 받고 싶었던 내 속마음을 엉성하게 얼떨결에 털어놓게 되었다. 상 없이, 응무소주 이생기심으로 임하고자하는 목표치를 알고 있고 그렇게 되고 싶었고 그렇게 보이고 싶었다.
그러나, 현재는 칭찬과 관심이라는 약도 잘 챙겨 먹어야 한다. ‘해야 한다’에서 벗어나 솔직히 털어 놓아서 후련하다. 언젠가는 나아지겠지 가 아닌, 이 모양 이대로 계속 되어도 이것이 나인 것을 어찌하랴? 그대로 받아들일 수 있어서 기쁘다.
장에서 한분 한분의 생육사를 만나게 되면서 깊은 감동과 울림이 있었다. 그분들이 온몸으로 온 마음으로 직면하여 건너오신 삶의 어려움들에게 응원과 격려의 마음 보낸다. 내 앞에 계신 존재들에게 차곡차곡 쌓여있는 희노애락의 시간과 공간들.. 온전히 존중해드리고 사랑해드리고 싶다.
한편, 내게 역 경계 역할을 해주셨던 분들에게 존재로서의 감사함을 전한다.
사람은 바뀌지 않는다, 내가 할 몫은 그들을 바꾸고자 하는 의도를 내려놓고 바뀔 수도 있다는 기대도 탐으로 여길 때 비로소 온전한 존중이 되리라 여겨진다. 그들의 그 모습 그대로 온전히 존중해 주고 싶다. 내게 남겨진 그들에게 받았다고 느껴진 내 안의 불편함, 서운함, 아쉬움의 불꽃들...그 인의 그 과로 수용하는 것이 과제 일뿐.
함께 해주신 마스터님들에게 깊이 감사드린다. 엔카운터의 정신에 맞게 있는 그대로 수용해주심으로서 깊은 참만남을 갖게 해주신 도안님, 있는 그대로의 수용을 해드릴 수 있는 과제를 남겨주신 열매님, 때론 짓궂게 때론 강하게 때론 속 깊은 곳을 시원하게 해주신 동네 삼촌 같았던 일우님. 3분의 마스터를 포함한 장에서 함께 하나 되어 주셨던 모든 도반님들께 감사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