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봄비는 참 얄궂다. 어떤 날의 봄비는 ‘따뜻함’을 데리고 오기도 하지만 그렇지 않은 날은 날씨를 다시 겨울로 되돌리기도 한다. 4월의 첫 주말, 서울을 비롯한 전국에는 비가 내렸고 그 후 며칠간은 다시 겨울이었다. 그래도 봄을 목전에 둔 겨울이었기에 마음은 그리 무겁지 않았다.
바람과 함께 몰아치는 비를 맞으며 서울 종로에 위치한 동사섭 서울센터를 찾았다. ‘동사섭’으로 많은 사람들의 마음을 어루만져주고 있는 용타 스님이 서울에서 법문을 하는 날이기 때문이다. 스님은 매월 첫째주 토요일 오전에 대중들을 만나고 있다.
사전에 접수를 해야 참석할 수 있는 정도로 스님의 법문은 인기다. 이날도 40여명을 수용할 수 있는 강의실에 두 배 가까운 사람들이 몰려와 발 디딜 틈이 없었다.
오전 10시가 되자 용타 스님이 모습을 드러냈다. 이날 법문의 주제는 ‘삶이란…’ 이다.
“여러분들께 감사의 마음을 전합니다. 여기 서울센터에 발만 디디면 모두 행복해진다 하고 제가 걸어 놓았으니 여러분들 오늘 이곳에 오신 인연 공덕으로 모두 행복하시고 130세까지 무병장수하시길 바랍니다.” 따스한 축원과 함께 시작된 강의에 앞서 스님은 평소 강조하고 있는 돈망(頓忘)법을 다시 풀어줬다.
“자, 모두 이런 저런 생각하지 말고 그냥 있어 봅시다. 그냥 있는 이것이 무한 퍼센트 행복이고 그냥 깨어 있는 이 의식이 자성(自性)입니다. 그냥 있으면서 정신만 제대로 차리면 누구나 다 5분 안에 느낄 수 있는 것이 행복이요 해탈입니다. 원래 부처님 법이 그렇습니다. 그런데 10년, 20년, 혹은 수십 년을 수행해야 되는 것처럼 변해버렸어요. 다시 한 번 해봅니다. ‘그냥 있으니 돈망(頓忘)천국이요, 한 생각 일으키니 지족천국이라네.’ 아침에 눈 뜨면 곧장 이것저것 해야 할 일을 생각하며 직장으로 달려 갈 것이 아니라 잠깐 동안만이라도 그냥 깨어 있는 이 의식을 느껴보도록 합시다. 그리곤 늘 만나는 존재들에게 감사함을 느끼면서 살아갑시다.”
돈망(頓忘)은 ‘이미 없다’는 의미로 용타 스님이 공리(空理), 식리(識理), 자성(自性)이라는 불교 가르침의 핵심을 통합시켜 만든 용어라 한다. 동사섭 수련 고급과정에서 다루어지는 이 돈망법은 용타 스님이 모든 사람들의 행복을 위해 세상에 전하고자 하는 최고법이다. 본격적인 강의는 우리의 ‘삶’을 12연기(緣起)로 풀어나가며 진행되었다.
“12연기의 열두 과정을 밟으며 삼세(三世)에 윤회(輪廻)하는 고통의 뿌리는 무명(無明)입니다. 그러니 무명을 끊어야 한다는 자각이 있어야 합니다. 무명이란 본래 나(我)와 세상(法)이 없는데 그것을 있다고 생각하는 실체 사고입니다. 『반야심경』은 ‘조견오온개공 도일체고액(照見五蘊皆空 度一切苦厄-오온이 모두 텅 빈 것을 비추어 보고 모든 고통을 구제한다)’이라 했지요. 아(我)와 법(法)이 공함을 깨달으면 모든 고통이 사라진다는 것입니다. 여기에서 깨달음이란 지고지난(至高至難)하고 신비한 그 무엇이 아니라 우리가 사유를 통해서 얻을 수 있는 이해를 말합니다. 그러나 사유하지 않는 중생의 미성숙한 삶은 촉수(觸受)과정에서 촉(觸)한 그것을 실체라 여기면서 애취유(愛取有)로 떨어지고 그 업력으로 번뇌 속 윤회를 무수히 반복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 전개 과정에서 언제나 깨어있어야 합니다. 이 순간이 바로 우리의 삶입니다. 이 순간에 깨어 있으면 우리는 깨어 있는 삶을 사는 것입니다.”
동사섭의 5대 원리, 정체․대원․수심․화합․작선
2시간 동안의 강의는 구수한 전라도 사투리에 유머까지 더해져 웃음소리가 끊이지 않았다. 이날 강의에 온 사람들 중 불자는 일부에 불과했다. 대부분이 이웃종교인이거나 무종교인이었다. ‘스님’이 하는 강의에 불자보다 ‘일반인’들이 더 많이 온다는 것은 불교계에 시사하는 바가 크다. 불교계가 깊이 생각해 봐야 할 대목이다. 여기에는 물론 용타 스님 개인의 원력(願力)이 큰 몫을 했다.
용타 스님의 또 다른 이름이라고도 할 수 있는 ‘동사섭(同事攝)’은 불교의 사섭법(四攝法) 중 하나다. 사섭법이란 보살이 중생을 향하여 베풀고(布施攝), 따뜻한 말로 위로하고(愛語攝), 이로운 일로 도와주고(利行攝). 나아가 그들과 희로애락을 함께하는(同事攝) 삶의 태도를 말한다. 용타 스님의 수련 프로그램은 이러한 동사섭의 의미를 바탕으로 하면서 세상의 모든 존재가 다 우주의 주인공임을 강조하고 있다.
출가자 신분으로 고등학교 독일어 교사를 하던 용타 스님은 당시 전남 교육계에서 시범 운영되던 ‘T그룹 워크숍’(Training Group Workshop)에 참석한 뒤 불교의 수행 원리를 접목시켜 동사섭 프로그램을 출범 시켰다. 1980년 겨울 강진 무위사에서 처음으로 시작된 동사섭 수련은 지금까지 2만 명이 넘는 사람들이 다녀간 한국의 대표적인 수행명상 프로그램이다. 일반 과정과 중급, 고급, 지도자 과정 등 수준별 과정도 다양하다.
“현재와 같은 동사섭 프로그램이 처음부터 만들어진 것은 아닙니다. 초기에는 순수한 엔카운터였습니다. 그 때는 이론 강의가 거의 없이 비구조적으로 마음나누기만 하다가, 점점 형식의 필요성을 느끼면서 구조적 나눔의 장으로 변화 발전하였고, 이론의 필요성을 느끼면서 점점 이론화가 이뤄졌습니다. 이후에는 관리되지 않는 마음은 나누어봐야 공동체 성숙에 큰 도움이 없겠다는 생각이 들어 ‘마음관리’를 더해 갔습니다. 그런데 마음관리의 궁극적 목표는 역시 일체 에고(Ego)를 끊고 마음이 해탈해야 하는 것이어서 초월명상의 장이 더해지게 되었고, 전체 수련과정을 개념적으로 확연히 드러낼 필요를 느끼고 2002년 하반기부터는 삶의 5대원리를 수련 과정으로 재구성 했습니다.”
스님이 말하는 삶의 5대 원리는 정체(正體), 대원(大願), 수심(修心), 화합(和合), 작선(作善) 등을 말한다. 이 중에서 정체와 대원은 체(體)에 해당하고 수심, 화합, 작선은 그 체를 실천하는 용(用)이다. 자신에 대한 바람직한 자아관을 정립(正體)한 위에 모든 이들의 행복해탈을 기원하는 대원을 세우고(大願) 그것을 위해 자신의 마음을 잘 닦고(修心) 이웃과 좋은 관계를 가져지며(和合) 세상을 위해 바람직한 행동을 한다(作善)는 것을 의미한다.
용타 스님은 “동사섭 수련이 지향하는 것은 다 함께 행복해지는 세상이다. 인류가 오래전부터 희구하는 목표이기도 하다. 또 모든 종교가 추구하는 세상이기도 하다.”고 말한다. 지난해 여름 서울센터를 시작한 것도 ‘다 함께 행복해지는 세상’을 지향해온 불교의 가르침을 서울이라는 대도시에서 좀 더 확실하고 근본적으로 드러내는 가르침을 펴기 위한 것이었다.
“부처님께서는 연기법을 깨달아 모든 고통에서 벗어나셨습니다. 사유라는 방편을 통하여 이 우주의 원리인 연기(緣起)를 이해하시고 고통에서 벗어나신 것이죠. 즉 사유라는 방편을 통해 연기의 이치를 깨달으신 것입니다. 이것이 팔정도(八正道)의 첫째와 둘째 덕목인 정견(正見), 정사유(正思惟)에요. 우리 불교는 이 부분을 다시 돌아보고 그것을 살려내야 합니다. 사람은 누구나 지니고 있는 사유라는 능력을 통해 연기법이 말하는 공(空)의 이치를 이해하고 그것을 올바른 가치관으로 삼아 자아에서 벗어나 행복해질 수 있습니다. 그 원리가 바로 돈망법입니다.”
동사섭에 대한 이야기를 들으며 30년이 넘는 시간동안 마음수행 프로그램을 이끌어 오고 있는 스님의 출가인연이 더 궁금해졌다. 또 ‘이 시대의 살아있는 도인’으로 추앙받았던 청화 스님은 어떤 스승이었는지도 듣고 싶어졌다.
많은 이야기를 듣기 위해 이번에는 함양 동사섭 행복마을로 갔다. 우연인지, 용타 스님을 만나는 날만 되면 비가 온다. 행복마을과 주변 산은 봄비에 흠뻑 젖어 있었다. 찾아간 그날 행복마을에는 20여명의 사람들이 매월 넷째주 진행하는 월례정진에 참여해 마음을 나누고 있었다.
광복절에 진정한 해방을 맞이하다!
서울과 함양을 오가는 빡빡한 일정에 지칠 법도 하지만 스님은 웃음을 잃지 않고 있었다. 신록에 스며드는 창밖의 비를 보며 ‘2부’ 인터뷰를 시작했다.
“제가 대학 3학년 때 출가했는데 출가하기 1년 전에 은사스님을 만났습니다. 같이 자취하던 친구가 은사스님 문하에서 출가생활을 하다 환속한 사람이었습니다. 그 친구한테서 하루도 거르지 않고 은사스님에 대해 들었습니다. 그 친구 말만 들으면 우리 은사스님은 너무도 위대한 대(大) 도인이었습니다. 사람이 아닌 존재로 느껴졌어요. 너무나 다양한 이야기를 듣다 보니 어느새 저도 모르게 은사스님에게 빠져버렸어요. 그렇게 얘기만 듣고 있던 어느 날, 은사스님께서 우리 자취방에 오셨습니다. 비록 환속했지만 제 친구가 잘 있는지 직접 확인하시려고 온 것이죠. 엄청난 기대와 달리 저는 은사스님을 처음 뵌 순간 ‘그냥 평범한 스님이구나’는 생각만 들었어요. 수행자의 느낌은 났지만 뭔가 특별한 분이라는 생각은 안 들었습니다. 제가 너무 큰 그림을 그려놨던 것 같기도 했어요. 어찌 됐든 그런 인연으로 인사를 드리고 그 후 몇 차례 더 만날 기회가 있었는데 뵐수록 은사스님의 향기가 제게 스며들었습니다. ‘위대성’을 알게 됐다고 할까요? 자연스럽게 은사스님 옆에 붙어 있는 시간이 늘었고 결국 자취방에서 나와 스님이 계시던 광주 추강사에 살며 스님을 모시다 출가를 했습니다.”
용타 스님은 청화 스님을 만나기 전까지는 침례교회를 다니던 평범한 청년이었다. 그러나 한 청년의 삶은 ‘인연’을 만나면서 급격히 바뀌고 말았다.
“제가 1964년 8월 15일에 계(戒)를 받았습니다. 나라가 해방된 날, 저도 해방되어 버렸습니다. 하하.”
스님은 계를 받았지만 대학을 졸업하고 8년 6개월 정도 교사를 했다. 전공은 철학이었지만 독일어 교사를 했다. 철학 원서들을 많이 읽으며 독일어를 익혔기에 어렵지 않게 교사를 할 수가 있었다. 스님은 교사 생활을 하면서도 진리를 구하고자 하는 마음을 버릴 수 없었다. 결국 스님은 다시 선원으로 환지본처(還至本處)했다.
1974년 여름 송광사 선원에서 첫 안거를 지낸 후 스님은 오랫동안 제방에서 정진했다. 청화 스님이 주창했던 염불선(念佛禪)과 간화선(看話禪)을 병행했다. 사실 간화선 중심인 선방 정진풍토에서 청화 스님의 염불선은 철저한 비주류였다.
“은사스님의 염불선은 제 노스님이신 금타 대화상의 사상을 이어받은 것입니다. 금타 대화상께서는 288자로 된 ‘보리방편문’을 제시하셨습니다. 보리방편문은 공성상일여의 일합상이라는 우주관으로 심즉일불(心卽一佛)을 드러내어 아미타불을 상념하도록 하고 있습니다. 금타 대화상과 은사스님의 이 가르침을 공부해 본 사람이라면 실상이언(實相離言)의 우주자체를 드러내는 보리방편문의 위대성을 금방 알 수 있습니다. 금세기 최고, 최귀의 가르침이고 수행법이죠.”
용타 스님은 선방에 다니다가도 기회가 있을 때마다 청화 스님을 모셨다. 동사섭 프로그램을 본격적으로 진행하기 전인 1978년의 일이다. 함양 용추사 주지를 하던 용타 스님을 보기 위해 청화 스님이 왔다. 절 사정이 좋지 않았지만 형편대로 수행하고 있는 제자를 격려하기 위해서였다. 정진 대중 모두가 참여한 새벽 예불이 끝나는 순간 청화 스님이 가사를 수한 상태 그대로 공양주 보살 앞으로 다가갔다. 그리고는 큰절을 했다. “어려운 절 살림에 이렇게 열심히 살아줘서 고맙다.”며 손을 잡아줬다. 갑작스런 절에 공양주 보살은 연방 고개를 숙일 수밖에 없었다.
용타 스님은 “은사스님에게 모든 사람은 다 부처님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만나는 사람들을 항상 부처님 대하듯 하셨다.”고 전했다.
제자를 아끼던 청화 스님의 마음을 알 수 있는 이야기 하나. 제자 한 명이 절 아래서 술을 먹고 값을 치르지 않아 술집 주인의 불만이 커져 가고 있던 어느 날 청화 스님이 그 집 앞을 지나가고 있었다. 그러자 그 주인은 기다렸다는 듯 청화 스님에게 하소연을 했다. 다른 사람 같으면 불호령을 내렸을 것이지만 청화 스님은 “진작 말씀하시지 이제 말씀하십니까? 미안하게 됐습니다.”라고 사과하며 술값을 대신 계산했다. 이 소식을 들은 그 제자는 그 날로 술을 끊고 정진에만 몰두했다. 청화 스님이었기에 가능한 일이다. 이런 일화는 수없이 많다고 한다.
모든 물음에 답을 주시던 스승
용타 스님은 청화 스님이 그 어떤 질문에도 답을 주시던 스승이었다고 전했다.
“궁금한 것이 생겨 은사스님께 여쭈면 답이 나오지 않는 게 없었습니다. 은사스님은 선교율(禪敎律) 그 어떤 분야에서도 막힘이 없었어요. 이 시대의 선교율 삼장 법사라고 할까요? 또 은사스님은 ‘청정 그 자체’였습니다. 깨끗하게 빨아 풀을 먹였을 때의 승복 같은 그런 느낌 있잖아요. 그리고 솔선수범 그 자체였습니다. 당신께서는 누구한테 무엇을 말씀하기 전에 이미 몸소 보여주셨습니다. 빨래나 방청소는 물론이고 당신과 관련된 것은 거의 직접 하셨어요. 우리 제자들이 처음 시자를 맡으면 할 일이 없어서 무안했던 적이 한 두 번이 아니었습니다.
은사스님께서는 언제나 하심(下心)을 하셨습니다. 하심 그 자체였습니다. 은사스님 신도 중에 이대 교수 한분이 계셨는데, 그 교수님의 은사도 이대 교수를 하셨던 분입니다. 자기 제자가 청화 스님 얘기를 많이 하니까 도대체 어떤 분인가 하는 생각에 직접 보러 오셨습니다. 인사만 하고 아무 말씀도 안했는데 그 노교수가 울기 시작했습니다. ‘청화 스님을 뵈니 지난 세월 아만으로 가득 찼던 제 인생이 아무 것도 아니다’며 말입니다. 이런 일화도 엄청 많습니다.”
청화 스님이 곡성 태안사에서 회상을 열었던 1980년 대 중반. 당대를 대표하던 선지식 중 한 스님이 청화 스님에 관한 이야기를 듣고 직접 찾아온 적이 있었다고 한다. 자신보다 한참 후배인 청화 스님이 궁금해서였다. 잠시 대화를 나눈 그 스님은 청화 스님에게 3배를 하고 평생을 도반으로 지냈다고 한다. 출재가를 막론하고 청화 스님은 대중들이 “절로 고개를 숙이게 하는” 그런 존재였다.
그렇다면 용타 스님이 생각하기에 청화 스님의 가르침 중 꼭 후학들에게 계승됐으면 하는 것은 무엇일까?
“은사스님은 ‘상(相)’이 없었습니다. 상이 없는 인품은 모든 불교인이 배워야 합니다. 앞서도 말씀드렸지만 차별을 두지 않고 모든 사람들을 다 부처로 대하셨습니다. 또 철저한 지계(持戒) 정신도 계승해야 합니다. 하루가 멀다 하고 터지는 최근의 파계 사건을 보면 은사스님의 모습이 더 그리워집니다.”
용타 스님은 그러면서 ‘스승’에 대해 정의를 내렸다.
불교에서 스승은 우선 깨달음 체계가 있어야 한다. 불교는 깨달음의 종교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도(道)에 대한 질문을 해줄 수 있어야 한다. 질문을 통해 제자들의 공부를 점검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와 함께 솔선수범하고 정직해야 한다.
다른 스님을 만났을 때도 들었던 생각이지만 용타 스님을 인터뷰 하면서 ‘스승을 잘 만나는 것은 정말 큰 복’이라는 생각을 다시 해본다.
인터뷰가 끝나고 나서 스님은 정진에 참여했던 사람들과 스스럼없이 대화의 자리를 가졌다. 교사로 일하고 있는 참가자들에게는 전직 동종업계(?) 선배로서 아낌없는 조언을 해준다. 용타 스님 스스로 청화 스님이 그랬던 것처럼 범접하기 어려운 스승이 아닌 곁에 있는 도반 같은 스승이 되려는 모습이었다.
빗줄기가 잦아들고 어둠이 짙게 내려앉아 세상이 고요해질 무렵 마지막을 질문을 던졌다.
“다음 생에도 인연이 돼 청화 스님을 만난다면 다시 모실 수 있습니까?”
“당연하죠. 우리 청화 큰스님을 다시 만나면 스승으로 모시는 것은 당연한데, 사실 저는 다음 생은 미국에서 태어날 것입니다. 현재 세계 문명과 문화의 흐름을 주도하고 있는 곳이 미국이잖아요. 미국이 현재 법(法)을 펴기에 제일 좋은 곳이라고 생각하고 있어요. 미국 사람들에게 법을 전해서 깨달음을 알게 해주고 싶습니다. 그래서 그 미국 사람들이 다시 세계에 깨달음을 전하도록 하겠습니다. 수십 년 후에 미국이 그렇게 변한다면 그 안에 제가 있을지 모르겠습니다. 하하.”
청화 스님은 1923년 전남 무안에서 태어난 스님은 일본과 한국을 오가며 학업을 이수했고 해방 이후에는 사재를 털어 학교를 세워 교육사업을 펼치기도 했다. 동서양의 철학에 심취해 있던 스님은 1947년 백양사 운문암에서 금타 스님을 은사로 출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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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철주 객원기자 budgate@hanmail.n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