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실체 없는 ‘나’ 도려내 행복해지는 비법 담다
“그것은 증오(證俉)가 아니라 해오(解悟)입니다.”
환희의 법열이 사라지기엔 한 마디면 족했다. 스스로가 찾았던 깨달음이 10억원 돈뭉치라 여겼었다. 고작 10만원에 불과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풀이 죽었다. 안쓰럽던지, 청화 스님이 한 마디 더 보탰다. “그러나 한국에 색즉시공을 그 정도로 요해한 이가 얼마나 될지 모르겠습니다.”
대학 2학년 때 만난 불교
반야심경 색즉시공에 몰입
30여년 동사섭 이끌어오며
50년 수행 요체 책에 담아
“강 건너 불구경만 하지말고
공의 이치 골수서 활구돼야”
동사섭 프로그램을 고안해 33여년 간 행복을 파종해온 행복마을 이사장 용타 스님이 뇌리에 각인된 기억을 꺼냈다. 41세였던 당시 청화 스님과 만남이 인생의 전환점이었다. 앞서 불연은 몇 번 더 있었다. 전남대 철학과에서 고등학교 때부터 절에 다니던 친구를 만났다. 그가 독송하는 반야심경이 스님을 끌어당겼다. 260자 가운데 ‘색즉시공’에 사로잡혔다. 한글 음이 아닌 한자로 써달라고 청했다. 어떻게든 ‘색즉시공’을 풀어헤치고 싶었다. 사유가 시작됐다. 만나는 이들마다 물었다. “실체(색)가 존재하는 데 어떻게 공이 될 수 있는가.” 돌아오는 답들은 시원찮았다. 꼬박 두 달간 골몰했다. 꿈결 속에 들리는 소리에 잠을 깼다. 금강석 같던 ‘색즉시공’도 함께 깨졌다. 온몸이 투명한 보자기에 칭칭 감겨 있다는 사실을 발견했고, 투명보자기를 벗어버리니 시원했다. 1963년 대학 2학년 여름일이었다.
이 일을 청화 스님에게 꺼냈다 들은 말이 ‘해오’라는 선고였다. 이치로만 이해했다는 가르침이었다. 참선이 깊고 깊어져 멸진정에 이르러야 증오에 닿는다는 얘기였다. 대학 3학년이던 그 해 8월15일 청화 스님 맏상좌로 출가했다.
용타 스님은 그 때부터 공의 이치(空理)를 차곡차곡 정리해나갔다. 그 동안 대학을 졸업한 뒤 독일어 교사로 10여년 재직했다. 대학원에서는 ‘불교의 선에 관한 연구’로 석사학위도 받았다. 머리로만 불교를 이해하지 않았다. 제방 선방에서 20안거를 성만했다. 그리고 쌓아왔던 공리를 수행 프로그램에 접목시켜 나갔다.
1980년 강진 무위사에서 동사섭을 시작했다. 동사섭은 행복으로 이끄는 정체, 대원, 수심, 화합, 작선 등 5개 원리를 바탕으로 한 프로그램이다. 천하 주인인 자신이(정체) 우리 모두의 행복을 위해(대원) 먼저 마음 닦아 스스로가 행복해져(수심) 주변과 평화롭게 지내며(화합) 세상을 위해 역할을 한다(작선)는 게 동사섭이다. T 그룹 워크숍이라는 엔카운터 모임으로 출발했다.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된 수련 프로그램이기도 하다. 1982년 동사섭이라 이름을 붙이고 백장암에서 이어져왔다. 용타 스님은 2005년 재단법인 행복마을을 설립하고 두 해 지나 경남 함양에 동사섭문화센터를 개원했다. 2012년엔 서울에도 센터가 문을 열었다. 일반, 중급, 고급, 강사, 지도자과정과 청소년행복캠프 등이 진행되고 있다. 그 간 2만여명의 수련생이 다녀갔다. 용타 스님의 공리가 증명된 셈이다.
그렇게 50여년. 27개 공리가 익어왔다. 반백년을 묵혀온 셈이다. 민족사에서 ‘空’으로 엮었다. 부제처럼 ‘空을 깨닫는 27가지 길’이 담겼다. 용타 스님이 대학 때 경험했던 해오는 ‘의근고공(依根故空)’, ‘파근현공(破根顯空)’이다.
“존재하는 모든 것은 그 모양, 그 색깔, 그 크기가 사실로서 존재하는 것이 아닙니다. 일단 바라보는 자의 주관적인 근(根)에 의해 결정되는 것이지요. 그렇게 비쳐 보이는 존재는 실체나 실상이 아닙니다. 의지하고 있는 그 뿌리의 실체가 없으니 비쳐 보이는 존재도 공입니다. 세계는 우리의 육근(六根), 즉 눈, 귀, 코, 혀, 몸, 의지 등 프리즘이 만든 것입니다.”
백색 투명한 빛이 프리즘을 통과하면 7가지 색깔로 나타난다. 이게 무지개 본질일까. 아니다. 프리즘을 제거하면 무지개 빛깔은 사라진다. 육근을 제거하면 현상은 사라지고 텅 빈 투명세계가 보인다는 게 용타 스님 설명이다. 파근현공이다.
용타 스님은 사유의 힘을 믿었다. 물론 멸진정에 이르는 앞선 단계로서 그렇다. 부처님 정각을 예로 들었다. 5년 6개월의 고행으로도 생로병사를 해결하지 못했던 싯다르타는 보리수나무 아래 앉았다. 그리고 사유했다. ‘내가 죽는다. 나는 죽기 싫다. 나란 무엇이냐. 죽기 싫어하는 나, 죽어야 하는 나는 누구냐.’ 결국 ‘나’라는 존재 그리고 세상 모든 존재는 어떤 조건이 결합된 서로 연결된 연기적 존재임을 깨달았다.
용타 스님은 “죽어야할 내가 본래 없다. 죽고 싶지 않은 내가 본래 없다. 조건이 사라지면 없는 실체가 과연 실체인가”라고 되물었다. 난로 위 물방울이 열로 인해 순간 기체라는 형태로 사라졌을 때, 그것을 물방울이라 할 수 없는 것과 같은 이치였다. 스님은 ‘없는’ 실체를 ‘있다’고 여기고 집착하기 시작하면서 고통이 시작된다 했다.
존재는 고통에서 벗어나 행복에 이르고자 한다. 때문에 고통의 원인을 뿌리째 뽑아야 하며, 그 원인은 탐진치 삼독심이라고 스님은 말했다. 치라는 어리석음, 곧 실체를 고정적인 것으로 인식하는 마음을 없애야 한다고 했다. 용타 스님은 사유를 당부했다.
“공의 이치는 50년 동안 만들어져 왔습니다. 참으로 세월 묵은 책입니다. 그저 한 번 읽고 말 책이 아닙니다. 거듭거듭 읽고 사유하면서 공의 이치가 거듭거듭 ‘아하’로 다가와야 합니다. 불자라면 깊이 공부해야 합니다. 언제까지 강 건너 불구경 하듯 깨달음을 미루겠습니까. 불교는 공문(空門)입니다. 공의 문에 들어서야 불교입니다. 지금 바로 두드리십시오. 마치 공기를 마시지 않으면 죽는 것처럼 절절한 마음으로 공이 골수에서 활구로서 성성하기 바랍니다.”
몇 억 광년 떨어진 별은 태양빛을 반사해 지구에 다다른다. 몇 억 광년 뒤의 빛을 보는 셈이다. 이미 사라진 별도 있다. 지금 여기서 밤하늘에 총총히 박혀 빛나는 별은 실체일까. 열쇠는 ‘空’에 있다.
최호승 기자 time@beopbo.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