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육조단경 법문 ①-동사섭 행복마을 이사장 용타 스님
견성성불이라는 말에 속지 말고 걸림 없는 자유로 나아가라
여러분 반갑습니다. 시작에 앞서 ‘육조단경’ 강의를 할 수 있는 기회가 주어져 기쁘다는 말씀을 드리고 싶습니다. 여러분에게 ‘육조단경’ 공부할 기회를 얻었다는 것은 천재일우가 됩니다. 왜 천재일우인지는 이 강의가 끝나기 전에 충분히 느끼게 될 것입니다. 강의 교재는 청화 큰스님께서 번역하신 ‘육조단경’입니다. 청화 큰스님은 제 스승이십니다. 이 책에는 그분의 숨결이, 그분의 에너지가 고스란히 배어있습니다. 청화 큰스님은 이 책을, 단지 쓰기 위해 쓰지는 않으셨습니다. 당신의 골수를 뽑아내는 심정으로 정성스럽게 번역을 하셨습니다. 청화 큰스님은 저술을 많이 남기지 않으셨습니다. 그런데 마지막 번역서가 바로 이 ‘육조단경’입니다. 이 책을 내놓으시고 돌아가신 셈입니다. 그래서 여타의 ‘육조단경’ 번역본과 달리 청화 큰스님의 ‘육조단경’에서는 맑은 에너지를 느낄 수 있을 것입니다. 여러분들이 손에 이 책을 쥐고 있다면, 이미 청화 큰스님의 기운이 전달되고 있을 것입니다.
‘육조단경’ 공부는 견성보다
지금 여기서 자유로움이 목적
진여불성을 나만의 것이 아닌
우주로 연결해 외연 넓혀가야
돈법은 규정할 수 있는 것에
걸려들지 않는 세상을 의미
본격적인 강의에 앞서 ‘육조단경’을 공부하는 방법을 이야기해볼까 합니다. 가장 중요한 것은 읽는 것입니다. 먼저 읽어야합니다. ‘독서백편의자현(讀書百遍義自見)’이라고 했습니다. 책을 백 번 읽으면 그 뜻이 저절로 드러납니다. 누군가 ‘육조단경’이 어렵다고 말한다면, 그것은 마음을 가다듬고 많이 읽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한 번 읽고, 두 번 읽고, 세 번 읽고, 백 번을 읽어보시길 바랍니다. ‘반드시 백 번 읽겠다’는 마음가짐이 중요합니다. 물론 처음에는 캄캄할 것입니다. 그러다가도 일시에 수긍하게 되는 순간을 맞이하게 됩니다. 확 뚫리게 되는 것이죠. 바로 그때 걸림 없는 자유에 도착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육조단경’의 공부 목적은 무엇일까요. 견성이라고 한다면 70점짜리 대답입니다. 견성의 목적은 무엇입니까. 왜 견성하려고 할까요. 행복이라고 하면 99점짜리 대답입니다. 100점짜리 대답은 무엇입니까. ‘지금 여기 자유함’입니다. 이것이 팔만대장경을 공부하는 목적이요 ‘육조단경’을 공부하는 목적입니다. 여기서 나아가 주격을 ‘우리 모두’로 확장해볼까요. ‘우리 모두 지금 여기 자유함’은 모든 인간행위의 목적입니다. 여러분들, 지금 자유롭습니까. 그렇다면 ‘육조단경’을 공부하지 않아도 됩니다. 여러분 개인을 위해서는 필요가 없습니다. ‘지금 여기 자유함’이 확실하다면 말이죠. 하지만 우리는 공부해야 합니다. 다른 사람들에게 ‘육조단경’을 알려줘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우리 모두 지금 여기 자유함’을 향유할 수 있도록 해야 합니다.
‘지금 여기 자유함’이 되려면 걸리는 것이 없어야 합니다. 걸림이 있는지 없는지 살펴야합니다. 걸림이 없다는 조건 하에 자유함이 오는 것입니다. 걸림 없는 자유를 얻고 싶다면 ‘육조단경’을 봐야 합니다. ‘육조단경’에서는 본성 혹은 자성이 본래 자연스럽게 있어왔다는 의미로 ‘본자유지(本自有之)’라 합니다. 본래 자연스럽게 있어온 본성을 내가 ‘이것이 있구나’ 하고 수긍해버리면 됩니다. 그런데 많은 사람들이 본성을 수긍한다고 하면서도 30년은 치열히 수행해야 견성한다는 생각을 합니다. ‘본성은 특별한 존재일 것이다’ ‘본성은 마치 하늘을 날 수 있는 존재일 것이다’라고 규정해버리는 것이죠. 틀렸다는 게 아닙니다. 다만 저는 그렇게 말하지 않겠다는 것입니다.
제가 말하는 견성은 그동안 굳어진 견성의 개념이 아닙니다. 제가 말하는 견성은 혜능의 견성이고 달마의 견성이며 석가모니의 견성입니다. 이들의 견성은 실로 평이했습니다. 평상심이 도였던 것입니다. 이 평상심을 떠나 과연 어디서 진리를 찾겠습니까. 그 평상심을 빼놓고 어디 가서 부처를 찾을 것입니까. 여러분은 이미 평상심 속에 살고 있으면서도 스스로를 부정하고 있습니다. 달마가 중국으로 간 까닭도 이와 같을 것입니다. 인도불교가 엉뚱한 불교가 됐기 때문에 중국으로 건너와 시절인연을 기다렸던 것이죠.
청화 큰스님 역주 ‘육조단경’의 머리말과 해제를 보겠습니다. 머리말과 해제는 법문 중의 법문입니다. 청화 큰스님이 직접 쓴 머리말과 해제는 또 하나의 ‘육조단경’이라고 해도 틀린 말이 아닙니다. 청화 큰스님은 머리말에서 이렇게 쓰셨습니다.
‘부처님의 가르침은 교나 선이나 현교나 밀교나 대승이나 소승이나 다 한결같이 견성성불의 가르침 아님이 없다.’
모든 말씀은 견성성불을 위해 존재하는 것입니다. 견성성불은 무엇일까요. 견성은 성품을 보는 것이고 성불은 부처가 되는 것입니다. 자신의 자성을 보아야, 그것을 기준으로 내가 살아갈 수 있고, 그로 인해 부처가 돼가는 것입니다. 내 본성이 내 삶의 기준이 된다면 내 인품은 추락할 수 없습니다. 올곧게 성불해갈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부처가 된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할까요. 어떤 가치가 있을까요. 부처가 됨으로 인하여 고통에서 벗어나 즐거움으로 간다는 데 방점이 찍힙니다. 다시 말해 해탈하기 때문에 의미가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하기에 견성성불은 목적이 아니라 방편입니다. 견성을 하고 성불을 해야 내가 행복해진다는 말입니다. 견성성불이라는 말에 속지 말고, ‘견성성불을 하면 내가 굉장히 행복해질 거야. 그래서 견성성불이 의미가 있는 것이야’라고 정의해보세요. 걸림 없는 자유함을 느끼는 것, 이것이 궁극적인 목적입니다. 다음 구절을 읽어볼까요.
‘우리 인간의 근본성품인 진여불성은 비단 인간성의 본원일 뿐 아니라 유정무정 일체존재의 근원이며 바로 우주생명 자체인 것이다.’
진여불성하면 무엇이 떠오릅니까. 때 묻지 않은 마음이 내 안에 있을 거라는 느낌이 들지 않나요. 보통은 그렇게 느낄 것입니다. 저도 그렇게 생각하던 시절이 있었습니다. 틀린 생각은 아니지만 그렇다고 제대로 된 생각도 아닙니다. 부분적으로만 맞습니다.
흔히 진여불성이라 하면 내 마음속에 있는 깨끗한 것을 떠올립니다. 하지만 청화 큰스님은 나 한 사람만의 불성이 아니라 유정무정 일체존재들의 불성을 말씀하십니다. 우주 전체로까지 연결됩니다. 지금까지 생각했던 불성의 외연이 넓어지는 것입니다. 이 구절을 한 번 읽는다면 막막할 것입니다. 거듭 읽으면 불성의 외연이 넓어지는 게 너무나 당연한 것이라고 수긍하게 됩니다.
‘바야흐로 범세계적으로 혼란한 정보의 탁류 속에서 인간 지성의 가장 궁극적이고 보편적인 수도법문인 혜능대사의 최상승 돈교선법(頓敎禪法)은 실로 우리 인간실존을 일깨우는 제일의 보감인 동시에 심란한 역사적 무명을 다스리는 최선의 등명(燈明)이 될 것이다.’
돈교선법이 역사적 무명을 다스리는 최상의 광명이 될 것이라 하셨습니다. 돈교선법은 무엇입니까. 불성, 본성, 자성, 진여, 진여불성 등과 같다고 생각하면 됩니다. 돈교선법은 어떤 형태로든 있습니다. 그렇기에 이것을 봐야겠는데, 보는 것이 만만치 않습니다. 돈교선법을 알고는 있는데 보는 데 어려움을 느끼는 것은 제대로 보지 못하게 하는 뭔가가 구름같이 껴있기 때문입니다. 구름을 통과해서 보려고 하니까 안 보이는 것입니다. 해제로 가볼까요.
‘일체만유인 제법의 실상이 본래로 진여불성이기 때문에, 근원적으로는 일체선악에 따른 죄성(罪性)이 존재하지 않는 것이다. 다만 중생의 무명분별로 인하여 시비선악이 있게 되므로 진참회(眞懺悔), 곧 무상참회란 자기 본성인 자성 곧 불성이 본래청정함을 통찰하여 일체시일체처(一切時一切處)의 생각 생각에 자성을 여의지 않고 무염오(無染汚)인 무주상행을 여행(勵行)하는 것이다.’
돈법은 우리들이 규정할 수 있는 그 어떤 것에도 걸려들지 않는 세상입니다. 진위(眞僞), 선악(善惡), 미추(美醜)는 주관적으로 그렇게 규정한 것에 불과합니다. 규정된 것에서 벗어나 있다는 것을 수긍하게 되면 그것이 바로 돈법입니다. 사실 돈법은 어렵지 않습니다. 여기 똥이 있다고 가정해봅시다. 똥은 깨끗합니까, 더럽습니까. 똥은 깨끗하지도, 더럽지도 않습니다. 다만 코가 그것의 냄새에 적응해온 역사와 상응돼 더럽다고 여겨질 뿐입니다. 돈법이라는 게 이와 같습니다. 주관성 때문에 진실을 굴절시키지 말라는 게 돈법의 핵심입니다.
돈법으로 세상을 보면 가정에 우환이 생겨도 미소를 짓게 됩니다. 만약 집에 불이 났다면, 미소를 지으며 불을 끄게 되는 것입니다. 불이 나면 미소를 짓고 가만히 있는 게 아니라, 불은 선도 악도 아니지만 저것으로 인해 우리 가족들이 다 죽을 수 있다는 사실을 내가 알고, 이 앎에 의해 행동하게 됩니다. 그래서 돈법을 확실히 잡고 있는 사람은 담담한 미소를 지으며 불을 끄게 됩니다. ‘금강경’에서 말하는 ‘응무소주(應無所住)’는 미소를 짓는 것이고 ‘이생기심(而生其心)’은 불을 끄는 것입니다. 여러분 가정에서 일어나고 있는 우환들을 살펴보시길 바랍니다. 그렇다면 우환이 일어날 만한 인과질서가 촘촘히 엮여져 있고, 그저 법계의 흐름 차원에서 우환들이 일어나고 지는 것을 목격할 수 있을 것입니다.
정리=김규보 기자 kkb0202@beopbo.com
이 내용은 3월2일~4월20일 서울 조계사에서 진행되고 있는 ‘용타 스님 육조단경 법문’을 요약한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