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육조단경 법문 ②-동사섭 행복마을 이사장 용타 스님
‘오늘부터 나는 부처’ 확연히 알고 하루하루 행복 속에 살아야
계속해서 청화 큰스님 역주 ‘육조단경’의 해제 가운데 일상삼매(一相三昧)와 일행삼매(一行三昧) 부분을 살펴보겠습니다. ‘육조단경’에는 일행삼매 개념이 뚜렷하게 나타나 있는 데 반해 일상삼매에 대한 개념은 없습니다. 일행삼매는 무엇입니까. ‘육조단경’은 직심(直心)을 행하는 것을 일행삼매라고 합니다. 직심은 무엇입니까. 직심은 곧은 마음이요 진심이며 참마음입니다. 이 뜻이 쉽게 받아들여지지 않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돈법(頓法)을 잡아버리면 직심의 뜻이 마음속에서 쑥 올라오게 됩니다. 일상삼매와 일행삼매는 어떻게 이해하면 될까요. 종이를 둥글게 말았을 때 깨달음인 일상삼매는 횡단면입니다. 횡단면이 이어져 형성되는 종단면이 바로 일행삼매입니다. 횡단면으로서의 깨달음인 일상삼매가 삶의 실현적 흐름을 통해 현장에서 종단면으로 드러나면 그것이 일행삼매인 것입니다. 걸림 없는 마음이 곧은 마음이고, 이 곧은 마음을 살아버리면 일행삼매가 되는 것이죠. 해제의 ‘일상삼매와 일행삼매’를 읽어볼까요.
아미타불 떠올려 환희롭다면
그것을 일상삼매 대상 삼아야
특정 대상에 얽매일 필요 없어
불보살 지혜까진 아니더라도
사유 통해 어느 수준 도달해
삶 투철하게 살아가는 게 중요
모든 존재는 인과로 엮여져
우주는 한 덩어리의 유기체
어느 부분만 실체시하진 못해
“돈황본단경(敦煌本壇經)에는 일행삼매만을 역설하여 행주좌와일체처일체시(行住坐臥一切時一切處)에 순일직심(純一直心)함을 일행삼매라 하였는데 덕이본(德異本)이나 종보본(宗寶本)에는 정종분(正宗分)에 일행삼매를 언급하고 다시 부촉품(付囑品)에서 한결 구체적으로 일상삼매와 일행삼매를 재차 강조하였다.”
돈황에서 ‘육조단경’이 발견된 건 참으로 감동적인 사건입니다. 그야말로 오리지널 ‘육조단경’을 찾아낸 셈이죠. 그래서 덕이본 등을 오리지널에서 벗어난 수준 낮은 이본으로 취급하는 경향이 있는 것도 사실입니다. 하지만 덕이본을 집필한 몽산 스님은 화두의 대종장으로서 또 한 분의 혜능 스님이라 말할 수 있는 도인이었습니다. 몽산 스님은 분명히 ‘육조단경’ 원본을 손에 쥐고 읽었을 것입니다. 당신 자신이 눈이 확 열려 있으니, 얼마든지 글을 빼고 보태면서 자유롭게 써내려갔을 것입니다. 그런데 오리지널에 집착한 나머지 돈황본에 없는 구절들이 덕이본에 나오면 틀렸다고 고개를 저어버린다는 말입니다. 그러지 말고 덕이본 역시 나에게 찾아온 법인연이라고 여기시길 바랍니다. 내가 행복해지는 게 중요한 것이지, 어떤 ‘육조단경’이 권위가 있느냐고 시비를 가리는 게 중요한 것은 아닙니다.
“특히 사조 도신대사의 입도안심요방편법문(入道安心要方便法門)에는 ‘일상삼매는 우주법계가 진여실상의 일상이기 때문에 일상삼매라 하고, 생각생각에 일상삼매를 여의지 않고 참구수행함을 일행삼매라 하였으며, 선남자 선여인이 일행삼매에 입(入)하고자 하면 마음으로 오로지 한 부처의 명호를 상속(相續)하여 외우면 즉시 염중(念中)에 능히 과거·미래·현재의 제불(諸佛)을 볼 수 있는데, 그것은 일불공덕(一佛功德)과 무량제불(無量諸佛)의 공덕이 둘이 아니기 때문이라’ 하였다.”
아주 깨끗한 갈파입니다. 여러분은 일상삼매를 어느 한 가지로 한정하지 않아야 합니다. 만약 금빛으로 번쩍거리는 아미타불을 떠올리면 환희심이 생긴다고 해봅시다. 그렇다면 금빛으로 번쩍거리는 아미타불을 일상으로 삼아도 됩니다. 그것을 일상으로 삼고 밀고 나가버리면 내 마음에 평화가 샘솟습니다. 내 안에서 탐진치가 녹아버리고, 그래서 내 영성이 진일보합니다. 일상삼매의 대상이 반드시 특정한 무엇이어야만 한다는 게 아니라는 말입니다. 물론 보편적인 무엇이면 좋겠지만 방편이 다양하다는 점을 인정하는 게 먼저입니다.
기독교인들을 예로 들어볼까요. 하나님 상을 그리고 매순간 하나님을 읊조리는 기독교인에게 그 하나님은 일상삼매요, 그 하나님을 계속해서 붙들고 믿는 과정은 일행삼매가 됩니다. 그 사람에게는 그것보다 좋은 진리는 없습니다. 그래서 불자들과 다르다고 해서 틀렸다고 말하면 안 됩니다. 다른 것은 다를 뿐입니다. 만약 어떤 분이 예수님을 믿으라고 했는데, 내가 그것은 틀렸다고 지적한다면 내 마음은 걸려든 꼴이 될 것입니다. 내가 부처님이 좋듯이 저분은 예수님이 그리 좋은가보다, 하고 존중하면 됩니다. 만약 진지한 대화가 진행된다면 내가 그쪽으로 건너갈 수도 있고 그 사람이 이쪽으로 건너올 수도 있습니다. 접점을 찾지 못했다면 제 갈 길을 걸어갈 뿐입니다. 중요한 것은 내 마음이 걸려들지 않는 것입니다.
“그리고 문수설반야경을 인용하여 ‘부처를 염하는, 염불하는 마음이 불(佛)이요 망상하는 마음이 바로 중생이며 염불은 곧 염심(念心)이고 구심(求心)은 바로 구불(求佛)인데, 왜 그런가 하면 마음은 본래 모양이 없고 부처 또한 모습이 없기 때문이라’ 하여 이른바 안심법문(安心法門)의 원리를 도파하였으며, 그리하여 ‘항상 염념(念念)히 불(佛)을 억념하면 반연이 일어나지 않으며 번연히 모든 상을 여의고 여실하게 평등무이한 여래진실법성신(如來眞實法性身)을 성취하게 되나니, 달리 이름하여 정법이라 하고 또한 불성이라 하고, 제법실상이라 하고, 정토라 하고, 보리라 하고, 또한 금강삼매·본각(本覺)·열반계(涅槃界) 등 비록 이름은 헤아릴 수 없이 많으나 모두가 동일한 진여불성이니라’ 하였다.”
청화 큰스님은 염불선 수행자셨습니다. 염불선에도 여러 단계가 있는데 청화 큰스님은 최고 단계인 실상염불선을 수행하셨습니다. 청화 큰스님은 ‘육조단경’이 이야기하는 돈법을 부처라고 하여, 그 부처를 염하라고 하셨습니다. 왜냐하면 돈법이 바로 실상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실상염불입니다. 청화 큰스님의 가풍은 일단 염불이요, 더 나아가 실상염불이요, 더 나아가 실상이 바로 돈법이라는 것입니다. 청화 큰스님이 혼신의 힘을 다해 ‘육조단경’을 손수 번역하신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해제를 다 읽었으니 본격적인 ‘육조단경’ 공부에 앞서 달마대사에 대해 이야기해보겠습니다. 달마대사는 아시다시피 역사적 인물입니다만, 사실 역사적 인물이라는 사실 자체는 우리에게 큰 의미가 없습니다. 달마대사가 실존인물이 아니라고 주장하는 역사학자도 있습니다. 실존했다 하더라도 책들의 권위를 높이기 위해 달마대사의 이름을 붙였다는 주장도 있습니다. 우리가 주목해야 할 것은 이러한 논쟁이 아니라 고결한 뜻을 담고 있는 책입니다. 누가 썼든 내가 그 책을 읽고 감동하면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들이 선택할 일입니다만, 저는 책이 담고 있는 뜻이 중요하고 저 자신과 제가 사랑하는 이웃들을 변화시키는 일이 중요하지, 누가 책을 지었느냐는 상관하지 않는다고 말하겠습니다.
달마대사의 ‘이입사행론(二入四行論)’에는 자교오종(藉敎悟宗)이라는 말이 나옵니다. 저는 자교오종이라는 이 말을 무척 좋아합니다. 자교는 교에 의지한다는 것이고 오종은 진리를 깨닫는 것입니다. 교는 부처님과 조사님들의 말씀입니다. 부처님과 조사님들의 말씀에 의지해 진리를 깨닫는다, 이는 참으로 당당한 선언입니다. 선종에서는 사유를 중시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사유를 해서 불보살의 지혜까지는 못 올라간다 하더라도, 어느 정도 수준에만 올라간다면 귀하게 여길 수 있어야 합니다. 꼭대기까지 올라가지 못해도, 삶을 투철하게 살며 경전을 읽고 사유하고 참선해 사유 수준을 높이는 것, 그리고 그 수준에서 다시 내 삶을 투철하게 살아가는 것, 이것을 바로 인생이라고 말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사유를 중시하면서 스스로가 얻어낸 결론을 귀하게 여기고 이를 내 삶으로 살아가라 이 말입니다.
달마대사의 또 다른 책 ‘혈맥론(血脈論)’은 선서적입니다. 첫 페이지에 즉심즉불(卽心卽佛)이라는 말이 나옵니다. ‘이 마음 이대로 부처’라는 이 말은 ‘육조단경’의 ‘불성사상’이고 ‘자성사상’이고 ‘본성사상’입니다. 돈법이 아니면 ‘이 마음 이대로 부처’라고 외치기 어렵습니다. 돈법문화가 없던 시대, 대승불교 시대의 어느 지점에서 이러한 이야기를 했다면 틀림없이 몽둥이를 맞았을 것입니다. 쓸고 닦는 것을 적어도 3년 했다면 모르겠지만, 닦지도 않고 이 마음 이대로 부처라 하면 대단히 건방져 보였을 것입니다. 돈법이 없었던 구시대 불교에서는 감히 외람되게 내뱉을 수 없었던 말이었던 것입니다.
여기서 나아가 ‘번뇌즉보리(煩惱卽菩提)’라고 합니다. 번뇌까지 진리라고 보는 것입니다. 번뇌즉보리라는 말까지 지원하면서 즉심즉불을 외칠 수 있도록 하는 게 선불교입니다. 마조도일 스님에 이르면 한 수 더 떠서 여즉시불(汝卽是佛)이라고 합니다. 당신이 바로 부처라는 것입니다. 즉심즉불, 여즉시불이 받아들여집니까. 쉽게 받아들여지지 않는다면 ‘불성이 있다는 건 확실하지 않느냐, 그러니까 부처라고 밀어붙이면 되지’ 이렇게 접근해도 됩니다. ‘결국에는 탐진치를 여의고 성불한다고 하지 않느냐. 내일이나 모레에 부처가 될 것이 확실하니까, 오늘부터 나를 부처라고 하겠다’라고 스스로에게 말해보시길 바랍니다.
다른 방법으로는 연기법을 살펴보는 것입니다. 존재하는 모든 것은 인과로 엮여져 있습니다. 인과로 엮여져 있기 때문에 한 덩어리입니다. 나 없이 너는 있을 수 없고, 너 없이 나는 있을 수 없다는 게 세상의 이치입니다. 이 우주는 하나의 덩어리인 유기체이기 때문입니다. 그렇기에 어느 부분 딱 끊어서 실체시할 수 없습니다. 이쪽이 선이고 저쪽은 악이라는 말도 있을 수 없습니다. 이러한 하나의 덩어리에 부처라는 이름을 붙인 게 불교사상입니다. 본체로 보면 법신불이요, 속에 깃든 기운으로 보면 보신불이요, 두두물물 쪼개놓으면 천백억 화신 석가모니불이라고 규정한 것입니다. 이와 같은 불교의 존재철학을 마음만 먹으면 배울 수 있다는 게 얼마나 좋은 일입니까.
‘육조단경’은 ‘혈맥론’의 동생입니다. ‘혈맥론’의 즉심즉불을 그대로 받아서 자성사상을 펼쳐냈습니다. 여러분들이 즉불했다면, 즉불은 무엇을 합니까. 즉불은 해탈합니다. 즉불은 행복합니다. 여러분이 이미 즉불했고, 즉불은 해탈이라면 여러분은 해탈을 살고 있습니다. 혹 ‘해탈하지 않았는데 어떻게 해탈을 산다고 할 수 있을까’라는 의문점이 생긴다면 생각을 그렇게 했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이 자유를 바라보고 있다면 온 세상이 자유입니다. 누가 시켰기 때문에 눈을 깜빡입니까. 누가 시켰기 때문에 냄새를 맡습니까. 우리는 자유롭게 눈을 깜빡이고 냄새를 맡습니다. 이런 식으로 밀고 가보세요. 그렇다면 이대로 해탈인 것입니다. 달마대사가 의도했던 게 바로 이것입니다.
여러분들은 이미 즉탈했는데 0.0001%를 해결하기 위해 법문을 듣고 경전을 읽습니다. 0.0001%는 장차 해나가기로 합시다. 99.9999%는 해결했으니 즉불즉탈을 바로 살아버립시다. 세상이 하나의 불성덩어리인데, 어느 부분을 끊어서 진위(眞僞), 선악(善惡), 미추(美醜)로 차별화하지는 맙시다. 둘로 나눌 필요가 없는 세상이라는 가르침에 고개가 끄덕여집니까. 여러분들은 이미 즉탈했고 즉불입니다. 즉불인 내가 즉탈했음을 확연하게 알고 하루하루를 행복 속에서 산다고 한다면 공부는 하지 않아도 됩니다.
정리=김규보 기자 kkb0202@beop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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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내용은 3월2일~4월20일 서울 조계사에서 진행되고 있는 ‘용타 스님 육조단경 법문’을 요약한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