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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론에 비친 동사섭

NO1작성일 : 2016-04-20 오후 05: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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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떻게 살 것인지’ 확실히 손에 쥔 뒤 계와 정을 닦아라 (육조단경 법문 ③)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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육조단경 법문 ③-동사섭 행복마을 이사장 용타 스님

‘어떻게 살 것인지’ 확실히 손에 쥔 뒤 계와 정을 닦아라




 

 


부처님께서 입적하시기 직전 아난존자가 여쭸습니다. “부처님께서 돌아가시면 저희들은 누구에게 의지해야 합니까.” 부처님은 “자등명법등명(自燈明法燈明)하라”고 대답하셨습니다. 자등명을 법등명 앞에 둔 이유는 무엇일까요. 자등명은 ‘자신의 등불을 밝혀 그 빛을 따라가라’는 뜻입니다. 부처님께서는 이미 45년간 법을 설하셨기에 그 법대로 살면 되는데, 왜 자등명을 먼저 언급하셨겠습니까. 여러분들은 여기서 ‘스스로’에 방점이 찍혀있다는 것을 깨달아야합니다. 내면에 있는 자등의 소리, 자등의 불빛에만 의지하더라도 우리 인생은 충분하다는 것입니다. 결정적인 순간에서는 자신의 소리를 따라가야 합니다. 

 

 

 

자등명을 법등명 앞에 둔 건
‘스스로’에 방점 찍혔기 때문
결정적 순간에 직면했을 때
자신의 불빛 따라 걸어가야

부처님이 성취한 대각은 돈법
점법 치성한 세상 안타까웠던
달마대사는 돈법의 기치 올려

‘금강경’ 공부 첫 단계는 대원
육바라밀·파상이 다음 단계

강의 듣고 ‘아하’ 이해하면 돈법
정신집중이 필수조건은 아냐
태어날 때 가진 선정력으로 충분

 

 


 달마대사께서 중국으로 건너와 가장 먼저 하신 말씀도 ‘즉심즉불(卽心卽佛)’입니다. 이대로 다 부처입니다. 이 개념이 수긍돼야합니다. 부처님께서 대각을 성취했을 때, 그 대각의 내용은 바로 돈법(頓法)이었습니다. 하지만 돈법은 역사적으로 묻혀버리고 점법(漸法)이 치성해졌습니다. 생활의 국면 속에서 돈법보다는 점법이 더 중요하게 받아들여졌기 때문입니다. 두 농부가 서로 자신의 논에 물을 대려고 싸우다 결국 나라끼리 군대를 대치하는 상황에 이르렀습니다. 이때 군대를 이끄는 장수에게 “모든 존재는 떨어져 있는 게 아니라 결국 한 몸인 것이다”라고 말한다면 설득이 되겠습니까. 이보다는 “물보다 사람이 중요한데, 물 때문에 전쟁이 벌어지면 사람이 상하게 되지 않느냐”고 설득하는 게 효과적일 것입니다. 이처럼 세상에서 1차적으로 요구되는 진리는 점법입니다. 부처님 또한 대부분 점법을 설하셨습니다. 급한 불부터 꺼야했기 때문입니다. 돈법이 중요하지만 묻히게 된 이유입니다.

달마대사 입장에서는 이것이 너무나 안타까웠습니다. 그래서 점법으로 도배됐던 당시 세상에서 오직 단 하나, 돈법의 기치를 올렸습니다. 돈법이 수긍되는 순간, 그 공덕은 대단합니다. ‘육조단경’은 “단지금강경일권(但持金剛經一卷)하면 즉득견성(卽得見性)하여 직료성불(直了成佛)이라” 하였습니다. ‘금강경’을 공부하고 이해해 뜻을 수긍하게 되면 바로 견성하는 것이고 부처가 되는 것입니다. ‘금강경’은 돈법 중의 돈법입니다. 돈법의 인연이 내면에 스며든다고 하는 것은 굉장한 체험입니다. 돈법이 확연해지면 무한을 경험하게 됩니다.

‘육조단경’을 공부하는 공덕 또한 ‘금강경’을 수지독송하는 공덕과 똑같습니다. 육조혜능 스님은 ‘금강경’ 독송하는 소리를 듣고 발심했습니다. 그 후 홍인대사를 찾아가 ‘금강경’ 강의를 듣고 깨달음을 반석에 올려놓습니다. 그래서 ‘육조단경’이 곧 ‘금강경’이라고 여겨도 될 정도로 서로 연결돼 있습니다.

여러분들은 ‘금강경’을 어떻게 공부해야합니까. 첫 번째는 ‘대원(大願)’입니다. ‘무한우주에 있는 모든 중생을, 내가 다 제도해서 무여열반에 들게 하겠다’고 서원하는 것입니다. 그러한 서원을 하는 것 자체가 니르바나의 저 언덕으로 건너가는 방편이 됩니다. 뜨겁게 발원하는 사람은 논에 댈 물을 가지고 싸우지 않습니다. 발원하는 마음 자체로 중생심이 뚝뚝 떨어져버리기 때문입니다. 여러분들은 가족들만의 행복을 발원하겠습니까, 모든 중생의 행복을 발원하겠습니까. 선택의 문제입니다. 내 가족만 행복하면 된다는 심보로는 돈법제자가 될 수 없습니다.

‘대원’ 다음으로는 ‘육바라밀’입니다. 구류중생(九類衆生)을 다 제도하겠다고 마음먹었다면 행동이 나와야합니다. ‘금강경’에는 행동을 강조하는 대목이 거의 없습니다. 대승불교 시대의 경전이기는 하지만, 초기에 만들어졌기에 제도하는 행위를 구체적으로 강조하지는 않았던 것으로 생각됩니다. 그러나 뜻은 분명 들어있습니다. 드러나지 않은 뜻을 끌어내야합니다. 마지막으로 ‘파상(破相)’입니다. ‘나다’ ‘내 것이다’ ‘나에게 돌아온다’는 상에서 벗어나야합니다. ‘대원’ ‘육바라밀’ ‘파상’은 ‘금강경’의 삼요(三要)입니다. 계속해서 ‘육조단경’을 읽어보겠습니다.

“혜능답왈(惠能答曰) 인(人)은 즉유남북(卽有南北)이나 불성(佛性)은 즉무남북(卽無南北)이라 갈료신(猲獠身)이 여화상(與和尙)으로 부동(不同)이나 불성(佛性)은 유하차별(有何差別)이리오.”

자신을 찾아온 혜능에게 오조 홍인대사는 “남쪽에서 온 오랑캐가 어떻게 부처가 될 수 있겠느냐”고 말합니다. 그러자 혜능은 “사람에게는 남북이 있으나 부처의 성품은 남북이 없고, 오랑캐의 몸은 스승님과 같지 않사오나 부처의 성품에는 무슨 차별이 있겠습니까”라고 대답합니다. 어느 날, 더벅머리 총각이 찾아와 이러한 말을 할 때 홍인대사의 마음은 어떠했겠습니까. 혜능은 돈법을 말한 것입니다. 둘로 나눠진 것을 하나로 통합하는 게 불성입니다. 통합해서 일원화하는 게 돈법입니다. 통합이 되면 평화가 옵니다. 서로를 죽일 것처럼 싸우던 사람들도 상대방이 어렸을 때 헤어진 형제라는 사실을 알게 되면 싸움을 멈추고 부둥켜안습니다. 돈법은 하나가 되는 것이고 평화를 맞이하는 것입니다. 여러분들은 이미 하나요, 평화를 살고 있습니다.

“시유일행자(時有一行者)하여 수차혜능어대방(遂差惠能於碓房)하야 답대팔개여월(踏碓八箇餘月)하니라.”

홍인대사는 혜능을 방앗간에서 일하게 했습니다. 이 대목을 유념해서 보는 사람은 별로 없을 것입니다. 더벅머리 총각이 방아 찧는 일을 8개월간 했습니다. 500명 스님들의 밥을 만들었습니다. 혜능의 마음속을 사진으로 찍어봅시다. 8개월 방아 찧고 주지가 돼 돈을 많이 써야겠다, 혹은 큰스님이 돼서 대접받아야겠다, 이런 생각을 했겠습니까. 혜능의 마음에는 아무것도 없었습니다. 다만 오직 하나, 견성성불 해서 온전한 자유를 살 일밖에 없었습니다. 시종일관 그 순수한 마음으로 무심하게 방아만 찧었던 것입니다. 이제 ‘답대팔개여월’이라는 글자가 예사롭지 않게 느껴집니까. 홍인대사는 그 마음을 알아보고 의발(衣鉢)을 전수했습니다. ‘답대팔개여월’과 같은 단순한 말에서도 이러한 의미를 읽어낼 수 있어야합니다.

“오조왈(五祖曰) 오향여설(吾向汝說)하노니 세인(世人)의 생사대사(生死大事)어늘 여등문인(汝等門人)은 종일공양(終日供養)하여 지구복전(只求福田)하고….”

생사는 윤회합니다. 태어나고 죽고 태어나고 죽습니다. 어떤 때는 개가 되고 구렁이가 됐다가, 어떤 때는 지옥으로 떨어지기도 합니다. 이와 같은 생사윤회는 끔찍한 일이고, 하루빨리 벗어나겠다고 생각해야 합니다. 윤회에서 벗어나는 첫 단계는 돈법을 뚫는 것입니다. 팔정도 가운데 정견을 정립하는 게 바로 돈법을 뚫는 것입니다.

여기서 확실히 해야 할 게 있습니다. 대다수 불자들은 돈법을 뚫기 위해 수십 년 참선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이것은 큰 오해입니다. 정신집중이 바탕이 된다면 돈법을 뚫는 데 도움이 되긴 합니다만 필수조건은 아닙니다. 돈법은 강의를 듣고 고개를 끄덕이며 ‘아하’하고 이해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참선을 10년, 20년 한 다음에야 뭐가 뚫리지 않겠느냐는 사람이 너무 많아서, “금생에는 틀렸어”라는 말까지 나오는 것입니다. 참선이 잘못된 것이라는 말이 아닙니다. 이미 사람으로 태어날 때부터 상당수준의 선정력을 가지고 태어난다는 것입니다. 그 선정력만으로도 충분합니다.

9곱하기 9는 무엇입니까. “81”이라는 대답이 바로 나온다면 천진한 것입니다. “뭐 그런 것을 물어보느냐”고 따진다면 저항한 것입니다. 저항하는 순간 우리의 세포는 경직됩니다. 천진하게 대답하는 버릇을 기르시라는 말입니다. 법문을 들으면서 통할 수 있습니다. 법문을 통해 뚫고 나서 선정력을 익히면 좋습니다. 어떻게 살 것인지를 확실히 손에 쥐고 나서 계를 닦고 정도 닦아야 합니다. 원효대사는 해골물을 마시고 도를 통했습니다. 해골물 마시고 도통한 것을 신비한 경지로 여기는 것은 오해입니다. 이치로 생각해보면 바로 알게 됩니다.

여러분들은 진정으로 윤회에서 벗어나야 합니다. 다음 세상에서 다시 사람으로 태어난다는 보장은 없습니다. 하지만 만약 “금생에 잘못 닦았기 때문에 내생에 가겠다”고 생각한다면 한 가지 유념할 게 있습니다. 죽기 직전에 한 생각 바로잡으라는 것입니다. 업식이 둥그런 구체라고 한다면 구체 내부에는 10년 전, 20년 전 업들이 들어있습니다. 겉에는 최근 삶의 흔적들이 있습니다. 겉은 전경이고 속은 배경인데, 전경이 어머니 속으로 들어가게 됩니다. 들어갈 때 기준이 속마음이 아니라 겉마음인 것입니다. 그러니 여러분들은 나이가 들어갈수록, ‘지금 바로 여기’에서 마음관리를 잘 하시길 바랍니다. 전경을 가꿔나가면, 그것이 속으로 스며들어 무의식이 됩니다. 무의식을 건드리려고 애쓰지 말고 의식을 건드려보시기 바랍니다. 의식을 단련하면 그 에너지가 안으로 스며들어 무의식까지 해결됩니다.

물론 경우에 따라 무의식 자체를 문제로 삼고 해결해야할 때가 있지만, 그것은 특수한 처방이 있으니 일반적인 경우에는 현재의식을 잘 관리하도록 합시다. 다음 세상에서 삼악도로 떨어지지 않을 만한 그림을 겉에다 그리시라 이 말입니다.

정리=김규보 기자 kkb0202@beop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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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내용은 3월2일~4월20일 서울 조계사에서 진행되고 있는 ‘용타 스님 육조단경 법문’을 요약한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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