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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에 비춰지는 세상 하나로 보지 못하고 분별하면 고통 시작
어느 날, 홍인대사께서 제자들에게 스스로를 잘 살펴본 뒤 게송 한 수를 지어 가져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큰 뜻을 깨친 자를 법제자로, 즉 육대조사로 삼겠다는 생각이었습니다. 이에 500명 제자들이 대사형인 신수 스님에게 맡기자고 뜻을 모았고, 신수 스님은 게송을 지어 벽에 붙였습니다.
오조홍인, 게송 적은 신수에게
사유해 다시 지을 것을 당부
부처님도 삼매가 아닌 사유로
보리수 아래서 연기법 깨달아
현실은 마음가짐 투영에 불과
무의법 차원의 삶을 지향해야
점법은 시간을 필요로 하지만
돈법은 이 순간 알아차리는 것
시간 개념 아닌 인식전환 개념
존재하는 모든 것 걸림 없어
이 진리 잡으면 무한에 진입
‘身是菩提樹(신시보리수, 몸은 보리의 나무요) 心如明鏡臺(심여명경대, 마음은 밝은 거울 같나니) 時時勤拂拭(시시근불식, 때때로 부지런히 털고 닦아서) 勿使惹塵埃(막사유진애, 먼지 끼지 않게 하라)’
이 시를 오조 홍인대사의 수제자가 썼다는 생각이 드십니까. 이 시는 점법(漸法)시로서는 훌륭합니다만 돈법(頓法)시는 되지 못합니다. 제자가 이런 게송을 썼으니, 스승의 마음이 어떠했겠습니까. 신수 스님의 지견을 꾸지람할 순 없는 노릇이고, 다만 제자들을 불러 모아 이 시를 열심히 암송해 공부하라고 격려를 했습니다. 그리고는 신수 스님을 처소로 불러 말했습니다.
“그대가 이 게송을 지은 것이냐? 소견은 당도하였으나 다만 문 앞에 이르렀을 뿐, 아직 문 안으로 들어오지 못하였다. 문 안으로 들어와야만 자기의 본성을 보느니라. 다시 돌아가 며칠 동안 잘 생각하여 한 게송을 지어 바치도록 하여라.”
홍인대사께서는 며칠 동안 사유를 해서 다시 게송을 가져오라고 명령합니다. 여기서 잘 살펴야할 게 있습니다. 홍인대사는 “너 삼매가 형편없구나. 삼매를 통해 돈법을 손에 쥐어라”고 하지 않으셨습니다. “피 흘리는 심정으로 수년 동안 삼매를 부여잡은 뒤 다시 써와라”고 하지 않으셨습니다. 돈법을 손에 잡는 조건이 삼매가 아니라는 말입니다. 대신 뭐라고 하셨습니까. 며칠 동안 사유해서 다시 써오라고 하셨습니다. 돈법 깨달음의 조건은 삼매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돈법 깨달음의 조건은 사유라는 것입니다.
이 말을 싫어할 스님들이 많을 것입니다. 미움 받는 한이 있더라도, 내 양심으로는 이렇게 말할 수밖에 없습니다. 부처님은 어떠하셨습니까. 부처님이 보리수 아래서 연기법을 깨달은 것은 삼매를 통해서가 아니라 사유를 통해서였습니다. 그리고 그 깨달음을 가지고 다시 사유를 하여 사성제, 십이연기, 팔정도라는 교리를 정립했습니다. 사유입니다. 삼매에서 오지 않았습니다.
‘생로병사가 다 괴로운 일이다. 좋아하는 사람과 헤어지는 것도 미워하는 사람과 만나는 것도 모두 괴로움, 인생이 곧 괴로움 아니겠느냐. 이 고를 어떻게 없앨 것인가. 그 뿌리를 알고 뿌리를 뽑아버리면 될 것이다. 뿌리는 탐진치 삼독이고, 팔정도를 닦아 그것들을 뽑아버리자.’
부처님께서는 이렇게 사유하셨습니다. 사유하면 해결됩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사유해야 할까요. 선종은 유전돈법(唯傳頓法)의 기치를 올렸습니다. 오직 돈법만을 전한다는 뜻입니다. 이것이 ‘육조단경’의 특색이고 선불교의 특색이며 조사선불교의 특색입니다. 여러분들의 인생은 두 축으로 이뤄져 있습니다. 하나는 현실입니다. 현실은 여러분들 앞에 시도 때도 없이 항상 놓여있습니다. 어머니라면 어머니 노릇을, 선생님이라면 선생님 노릇을 잘 해야 합니다. 현실을 충실히 사는 게 하나라면 이보다 더 중요한 것은 마음가짐입니다. 마음가짐을 바르게 해야 한다는 말입니다. 현실은 마음가짐의 투영이기 때문입니다. 마음을 고려하지 않고 현실만 살아버리려 한다면 습관대로 말과 행동이 나오며 결국 인생을 망치게 됩니다.
전생부터 마음공부 잘 해서 마음가짐 수준이 높은 상태로 태어났다면 굳이 마음 단속할 필요가 없습니다. 그냥 살아버리면 됩니다. 하지만 그런 사람은 전 세계 70억명 가운데 100명도 되지 않습니다. 때문에 우리는 마음을 어떻게 해야 할 것인지에 대해 생각해봐야 합니다. 여기에 대한 답은 두 가지가 있습니다. 유의법과 무의법입니다. 유의법은 마음의 밑 부분을 형성하고 무의법은 높은 데에 자리 잡고 있습니다. 무의법 차원의 삶은 너무나 향기롭고, 그 향기를 맡은 이들의 탐진치를 모두 녹여버립니다. 유의법 세상인 현실의 수준을 높이기 위해서는 무의법이 필요합니다. 유의법적인 현실을 지고한 경지까지 끌어올릴 수 있는 게 바로 내 마음속에 들어있는 무의법인 것입니다. 무의법은 곧 돈법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돈법의 개념을 생각해봅시다. 돈법의 반대말은 점법입니다. 점법은 점점 되어가는 것입니다. 점점 되어가려면 시간이 필요합니다. 탐진치라고 하는 어둠을 없애기 위해 시간이 필요하다는 판단을 하고 수년 동안 참선하게 되면 그것이 조금씩 적어지는 것을 느끼게 됩니다. 이렇게 10년, 20년을 참선하면 탐진치가 완전히 없어져 부처가 되겠다는 희망을 가지게 됩니다. 이것이 점법입니다.
하지만 돈법은 시간이 필요하지 않습니다. 상식적인 관점에서는 탐진치를 인정하고, 끊임없이 갈고 닦아 그것을 없애고자 합니다만 관점을 다르게 해봅시다. 탐은 무엇입니까. 탐이라고 여겼던 그것은 사실 하나의 에너지일 뿐입니다. 연기법 차원에서 보면, 세상 모든 것들은 저 혼자 독불장군처럼 존재할 수 없습니다. 다른 것들과 인과관계를 맺을 때에 비로소 존재할 수 있습니다. 다른 것들과 연결되어짐으로써 존재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어느 부분을 끊어서 악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까. 만약 어느 부분을 끊어서 악이라고 한다면 그것과 관계를 맺고 있는 모든 것을 악이라고 해야 합니다. 존재하는 모든 것이 악이 돼버리는 것입니다. 그래서 연기법 차원에서는 티끌 하나도 악이라고 말할 수 없습니다.
점법이 시간을 통해 해결하는 것이라면 돈법은 이러한 진리를 ‘아하’하고 알아버리는 것입니다. 시간 개념이 아니라 인식전환의 개념입니다. 그렇게 되면 내 마음의 갈등은 모두 소멸됩니다. 내 마음에 비춰지는 세상을 하나로 보지 못하고, 즉 돈법으로 보지 못하고 진위(眞僞), 선악(善惡), 미추(美醜)로 가르면 고통이 시작됩니다. ‘육조단경’의 36대법은 상대를 세울 수 없다는 이 진리를 말하고 있습니다.
선은 무엇입니까. 선은 악입니다. 악은 무엇입니까. 악은 선입니다. 수긍이 되십니까. 수긍됐다면 돈법을 손에 잡은 것입니다. 돈법은 시간을 필요로 하지 않습니다. 이미 이 자리에서 내가 걸림 없는 상태로 있다는 것을 알아차리면 되는 것입니다. 돈법을 손에 쥐었다면 우리들은 이고득락(離苦得樂)입니다. 이고득락은 우리들이 궁극적으로 도달해야 할 자리입니다. 지금 여기서 걸림 없이 자유롭다면 점법이라도 아무런 상관이 없습니다. 지금 이 상태로 온전히 행복하기 때문입니다.
‘10점과 100점’ ‘1등과 10등’ 이런 개념은 걸릴 것들입니다. 이런 개념에 걸려버리면 내가 고통으로 가게 됩니다. 이고득락이 완전히 되어버리려면 걸리는 것들이 싹 사라져야 합니다. 자세히 들여다보면 걸릴만한 게 하나도 없습니다. 이곳을 봐도 걸릴 게 없고, 저것을 봐도 걸릴게 없고, 단 하나도 걸릴 게 없습니다. 존재하는 모든 게 걸릴 것 없다는 사실이 마음에 와버리면 돈법입니다. 돈법을 수긍하게 되면 내 마음은 자유입니다.
돈법을 잡아서 완벽한 이고득락이 돼야겠다는 마음가짐이 있어야 합니다. 동기가 있어야 한다는 말입니다. 돈을 벌고 싶은 사람들은 돈을 버는 곳으로 가게 됩니다. 마찬가지로 이고득락을 하고자 한다면 이고득락을 할 수 있는 곳으로 움직이게 됩니다. ‘육조단경’을 공부해서 진정한 희열, 걸림 없는 자유에 도달하고 싶지 않습니까.
‘육조단경’을 손에 쥔 이 인연으로 돈법공부를 제대로 하시기 바랍니다. ‘육조단경’에서 돈법을 이야기했다라고 여겨질 만한 부분에 밑줄을 그으며, 책이 시커멓게 될 때까지 읽어보세요. 읽다보면 틀림없이 모르는 부분이 나올 것이고, 더 알아봐야겠다는 부분도 나오게 됩니다. 궁금해지는 것이 중요합니다. 그런 뒤에 법문을 듣고 강의를 들으면 돈법을 확 잡아버릴 수 있게 됩니다. 돈법을 잡으면 무한에 들어서게 됩니다. 지상의 어떠한 공덕도 무한에 들어선 공덕을 넘어설 수 없습니다. 여러분들은 이 자리에 앉아있는 인연공덕으로 바로 그 무한을 걸머쥐길 바랍니다.
정리=김규보 기자 kkb0202@beop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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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내용은 3월2일~4월20일 서울 조계사에서 진행된 ‘용타 스님 육조단경 법문’을 요약한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