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여름이었다. 거실에 놓인 선인장 화분 귀퉁이에서 조그만 싹이 텄다. 누구신고 궁금하여 그냥 놓아두었다. 그 싹은 점점 자라더니 어느 날 아침, 맑은 하늘을 닮은 꽃을 피웠다. 푸른 나팔꽃이었다. 나팔꽃은 서너 송이 꽃을 피우고 새까만 씨앗까지 맺었다. 그 신통한 씨앗을 받아서 봉지 속에 갈무리 했다. 이번 겨울, 크리스마스가 가까워지고 있었다. 거실이 환해진 시간, 깜짝 놀랐다. 나팔꽃이 핀 것이었다. 겨울 나팔꽃! 가을에 들어서면서 나팔꽃 포기는 볼품이 없었다. 게다가 선인장을 방해하는 것도 같아 뽑아버릴까도 했다. 그래도 어찌어찌 살고 있으니 그렇게 할 수는 없었다. 그런데 이렇게 꽃까지 피울 줄이야! 겨울 나팔꽃은 여름꽃과는 달랐다. 그러나 찬탄할 수밖에 없었다. 여름 나팔꽃과 겨울 나팔꽃. 우리 사람의 눈엔 여름 나팔꽃이 더 아름답게 보인다. 그러나 우주의 품속에서 태어난 이 둘은 그 우열에 하등 차이가 없다. 여름 나팔꽃은 여름이 주는 조건에 따른 최선의 꽃이요, 겨울 나팔꽃은 겨울이 주는 조건에 따른 최선의 꽃이다. 두 개의 나팔꽃은 겉모습은 다를지라도 그 존재가 모두 최선의 존재라는 점에선 절대 평등하다. 아름답다면 둘이 모두 아름답고 기특하다면 그 둘이 모두 기특하다. 일어난 일은 일어날 조건이 있기에 일어난 것이고 일어나지 아니한 것은 일어날 조건이 없기에 일어나지 않은 것이다. 그래서 여름엔 여름 나팔꽃만 생기고 겨울엔 겨울 나팔꽃만 생긴다.
그러나 우리는 얼마나 주관적인가. 우리는 상대에게 자신의 주관적 기대치에 부응하기를 요구한다. 아니, 요구하는 것만이 아니고 은근히 압박하고 공격까지 한다. 그래서 겨울 나팔꽃에게 왜 여름 나팔꽃처럼 아름답지 않느냐고 다그친다. 여름 나팔꽃에게 어째서 겨울 나팔꽃처럼 찬탄스럽지 않느냐고 호령한다. 그러나 여름 나팔꽃도, 겨울 나팔꽃도 모두 완벽한 존재이다. 연기를 살펴라. 거울님이 말씀하신다. 눈앞의 것에만 정신 팔지 말고 그 주변의 사정을 함께 살피라는 것이다. 사정을 살피면 다 이해된다. 다 이해되면 누가 좋은가. 내가 좋다. 내 마음이 편하다. 과거는 다 옳다. 그렇게도 말씀하신다. 이미 생긴 것들의 과거로 소급해 돌아가 그 조건들을 제 기호에 맞게 수정할 수는 없다는 뜻이다. 그러니 그 인(因)에 그 과(果)로 생긴 것에 대한 시비는 참으로 영양가 없는 소모전이다. 그럼 어찌할 것인가. 과거는 닫혔지만 미래는 열려 있다. 그러니 잘 교류하라고 하신다. 상대의 말을 잘 듣고 그 사람의 마음을 공감해주며 소통하라는 것이다. 그 과정이 서로가 성장하는 길이다. 도대체 이 말씀을 몇 번이나 들었을까. 그래도 걸핏하면 습관에 빠져 이러고저러고 한참을 씨름한다. 그래서 또 글을 쓰면서 반복 정리한다. 체증이 내려가는 듯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