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이가 우리 집에 온 것은 10년 전이었다. 산골이 눈으로 하얗게 되었을 때였다. 양 옆구리가 서로 붙을 지경이 된 조그만 개가 퇴비 더미를 헤치고 있다. 불러서 찬밥 한 덩이를 주었다. 허겁지겁 먹어치우더니 집안에 들어오겠다고 방충망까지 뜯는다. 아랫집 형님 말에 따르면 그 개는 한 일주일 성황당 근처를 얼씬거렸다 한다. 개는 ‘눈이’라는 이름으로 우리 식구가 되었다. 산골에서 사람 믿고 사는 눈이에게 아무래도 동족의 친구가 필요할 것 같았다. 장에 나갔다. 할아버지의 종이 상자 속에 젖떼기 한배 새끼들이 잠들어 있었다. 그 중에 수놈은 한 마리뿐이었다. 그 애기는 똘이가 되었다. 어미와 떨어진 똘이는 눈이 덕분에 새 환경에 잘 적응해 나갔다. 다시 겨울이 되고 산골에 눈이 쌓였다. 눈이가 똘이를 데리고 산책에 나섰다. 제법 쌓인 눈 속에 똘이는 안간힘을 쓰며 제 누이를 따라간다. 눈이는 앞서 걷다가 뒤돌아서 똘이를 기다려 준다. 두 마리 작은 짐승들의 모습이 참으로 기특하고 어여쁘다. 눈이와 똘이는 서로를 한껏 드러내고 있다. 기다려주고 돌보아주는 눈이의 기특함은 똘이가 있기에 드러나고, 힘껏 따라가는 똘이의 기특함은 눈이가 있기에 드러난다. 그렇게 서로가 서로를 드러내며 함께 경험하고 성장하는 것, 그것이 삶이라는 아릿다운 현상이다.
우리의 세계는 잠시도 머물지 않고 끝없이 흘러간다. 그 무엇으로 고정되고 한정될 수 없는 무유정법(無有定法)의 세계이다. 이렇게 그 어떤 모습으로도 드러날 수 없는 이 세계는 서로가 서로에게 의지하여 비로소 드러난다. ‘나’는 ‘너’에게 의지하여 드러난다, 자식은 부모에, 남편은 아내에 의지하여 드러난다. 흑(黑)은 백(白)에 의지하여 드러난다. 동쪽은 서쪽에, 위는 아래에 의지하여 드러난다. 역방향도 마찬가지이다. 서로 나누어질 수 없는 이 한 쌍은 그 한 쪽이 없어지면 함께 사라진다. 그런데 우리는 머리끝까지 실체사고라는 어리석음에 빠져서 가를 수 없는 한 쌍 중에서 제가 해당되고 있다고 생각하는 쪽만 내세우려고 기를 쓴다. 너를 부정하고 나를 내세운다. 부모를 무시하고, 아내를 무시한다. 흑(黑)을 무시하고, 서쪽을 무시하고, 아래를 무시한다. 이것은 도끼로 제 발등을 찍는 정도가 아니다. 제 목을 제가 조르는 자해(自害)요 자폭(自爆)이다. 제 곁에서 저를 드러내주고 성장하게 하시는 존재들이시여, 은혜로운 신비시여. 이렇게 그대와 함께 무한을 호흡하나니, 이 이치를 거듭 확인하게 하소서. 결코 잊지 않게 하소서.